성지순례 솔뫼 성지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중략)…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을 위해 살라.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중략)… 우리는 조만간 전장(戰場)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성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내용의 일부분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담담히 교우들을 걱정하는 의젓한 모습이 느껴진다. 그는 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했을까.
당시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그는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단 이유로 체포돼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해인 1846년 9월 16일, 회자수(사형수의 목을 자르던 사람)는 칼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군문효수형은 조선시대 중죄인에게 내린 형벌 가운데 하나로 목을 베고 군문에 매달던 형벌을 말한다.
김대건 신부는 체포돼서도 끝까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순교 후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로,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갈매못 성지에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로 향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성지”는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소재에 있다. 한국인 최초 사제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생가 복원을 결의하고 2004년에 생가 안채를 복원했다. 생가는 1998년 충남지방문화재 제146호 기념물로 지정됐다. 이곳에서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개막미사가 열려, 프란치스코 교황과 청년들 간 2시간 정도 만남이 이뤄졌다.
솔뫼 성지에는 김대건 동상, 기념성당과 기념관, 솔뫼아레나(야외 문화공간) 등이 조성돼 있다.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형상화했다. 침몰 위험을 안고 떠난 일엽편주가 폭풍우에 돛이 찢기고 키가 부러졌지만 무사히 돌아왔듯이 한국천주교도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성장했음을 뜻한다.
라파엘호는 원래 바다가 아니라 강에서 운행하도록 만들어진 작은 돛단배였다. 외관은 순교자를 상징하는 붉은 색 소재를 사용했으며, 성당 가운데로 난 큰 길은 김대건 신부의 세계를 향한 드넓은 기개를 나타낸다. 아레나는 모래를 깔아놓은 로마의 원형극장을 말하는데, 솔뫼아레나는 김대건 신부와 동료들이 병오박해(1846년) 때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기념해 조성했다. 솔뫼아레나 주변으로 12사도상이 세워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기념관에는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과 일기, 그가 그린 조선전도,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22편의 서한과 비망록은 순교자 79위의 귀중한 시복 자료가 됐다고 한다. 서한은 라틴어로 돼 있으며, 훈춘에서 쓴 일기는 중국어로 돼 있는데 둘 다 작은 글씨로 지면을 여백 없이 빼곡하게 메운 것이 인상적이다. 김대건 신부는 영어, 프랑스어 등 5개국어 이상 구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에 직접 그린 조선전도는 프랑스 지리학회를 통해 조선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초상화는 연대별로 5개 가량이 전해지는데, 갈수록 젊고 미남으로 그려졌다.
김대건 신부는 그리스도교에 담긴 평등과 자유사상의 소유자이며 “조선후기 최초의 유학생으로 서양을 많이 알았고, 중국을 통해 아시아를 들여다봤으며, 화폐개혁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이어 “순교를 각오하고 쓴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자신의 순교에 대해 슬퍼하지 말라고 쓰여져 있는데, 신자들이 수없이 베끼고, 글 모르는 신자들은 외우고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