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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여우목 성지

윤정규 2019. 6. 3. 03:00

세 번째 순례지인 '여우목 성지'는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1791-1840)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9월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성모상·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9월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특히 여우목 성지는 베로니카 할머니의 신앙 증거 병인박해 때 이윤일 성인 등 3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의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곳이다. 중평리 여우목 밑의 마을에 살던 베로니카란 80대 할머니도 함께 포졸들한테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고령의 베로니카 할머니는 다리를 절면서 잘 걷지를 못했다. 자연히 끌려가는 대열에서 자꾸 처지자 포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랐다. "왜 할머니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 텐데 절뚝거리며 따라 가느냐?”. 구박을 주어도 베로니카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에게 되물었다. “살아계신 천주님을 어떻게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증거 했다. 노쇠한 베로니카 할머니와 포졸들과 포승줄을 끌어당기는 실랑이가 세 번째 오가다 우두머리 되는 자가 칼을 빼들었다. “그래,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베로니카 할머니는 끌려가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했다. 베로니카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여기는 중평리, 여우목 성지 1.5km’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