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성지
양근성지로 가는 길은 양평 옛길을 비롯해 고갯길, 강변길, 옛 철도 터널, 자전거길 등이 어우러져 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루하다 싶으면 마을길이 나오고 덥다 싶으면 남한강의 강바람을 만난다. 몽양 여운형 생가, 양근향교, 들꽃수목원,을 지나 천주교 양근성지에 도착했다.
양근’이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다가오는데 오늘날 ‘양평’의 옛 이름이 양근이었다. ‘양근’은 ‘버드나무 뿌리’라는 의미로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 주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은 데서 이곳의 지명이 유래했다. 버드나무는 특별한 제약 없이 어디서든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이곳에 튼튼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 뿌리들은 제방의 붕괴를 막는 등의 역할을 하며 이곳의 사람들을 재해로부터 지켜냈다. 이 버드나무가 많았던 양평은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성현 5명 가운데 권일신·철신 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우리나라에 서적(書籍)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이승훈은 중국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준 뒤, 양근으로 내려와 이존창과 유항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의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양근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가 시행된 곳이다.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은 이곳에서 초창기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서 천주교를 전파했다. 또한 남한강과 양근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기도 했다. 성지 안내에 따르면 버드나무는 초기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천주교가 뿌리를 내릴 무렵, 극심한 박해가 이뤄졌는데 신자들을 잡아 사형시키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를 내린 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잘 자라는 버드나무처럼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숙연해지게 하는 조형물들, 양근성지는 천주교 성인들의 탄생지이자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성지의 옆과 뒤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돌담이 둘러져 있어 평온하면서도 여러 조형물 등에서 숭고함이 느껴진다. 특히 높게 만들어놓은 십자가 예수님이 유난히 눈에 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매달려 있는 예수님은 포르투갈 파티마 성당의 나무로 만든 십자가 예수님 처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 예수님 옆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봤던 십자가의 길과 다른 모양이다. 십자가의 길 초입에는 힘겹게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님이 있다.
이와 함께 “나를 따르라(루카 9:59)”는 성서의 구절이 돌에 새겨져 있다. 그 예수가 걸었던 길을 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되새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십자가의 길. 보통은 그 장면들을 묘사하는 그림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는 반면 양근성지의 조형물들은 상징적으로 혹은 특정 부분이 부각돼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면 2처의 ‘예수가 십자가 지심’에서는 십자가와 그 위로 커다란 손만 조각돼 올려져 있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에서는 발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성지 입구 가까운 곳에는 한 쌍의 부부 상이 세워져 있다. 조숙(베드로), 권천례(데레사) 부부의 상이다. 이들은 지금의 성지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 동정부부 처럼 이들도 동정부부 이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성직자 영입을 위해 힘쓴 인물들이다. 이 같은 활동으로 양근천과 한강이 만나는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순교를 당했다. 버드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양근이라는 지명. 성지를 둘러보며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려 마을을 지켰듯,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위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가 지켜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