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청리 형방과 진무영
강화성당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가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 천도와 함께 세워진 궁궐터는 1964년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 유수부 동헌과 유형문화재 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 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전시) 등만 남아있다.
관청리 형방은 왕족의 세례 및 순교사건과 관련하여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이 처형된 곳이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고려궁지 밖에는 조선시대 해상경비를 맡았던 군영이자, 교우들을 끌어내다 참수했던 처형지인 진무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진무영에서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성인의 조카 장치선이며,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형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Roze, 魯勢) 제독의 강화도 출병을 촉발하였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년) 9월(양)과 10월 등 2차에 걸쳐 프랑스 함대가 서울 한강 연안(1차 정찰)과 강화도를 침범(2차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프랑스 성직자 9명이 처형된 사실을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함대 7척에 병사 800~1,200여 명을 파견하였다
1866년10월 초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함대는 포함과 연락선을 강화 갑곶에 파견, 마침내 상황은 전투로 발전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지만, 문수산성 전투(10월 26일)와 정족산성(전등사) 전투(11월 7일)에서 패한 프랑스 군은 강화읍을 불 지르고 11월 11일 강화 점령 1개월 만에 후퇴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진무영은 강화읍내 중심 도로에서 약 100m 강화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올라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부근 정도 까지가 진무영터가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