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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베론성지

윤정규 2019. 7. 17. 02:37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치는 계절인 여름. 여름휴가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활기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다. 올 여름 휴가는 주님을 찾아 마음의 양식을 쌓는 것은 어떨까? 번잡한 휴가지보다 산과 바다, 들판의 자연 속에서 심신을 달래보자. 틀에 박힌 피정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개인이나 가정 단위로 맘껏 쉬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베론성지를 소개한다. 천주교 성지 순례길은 멀리 스페인 산티아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130여 곳의 성지가 있다. 또한 국내 성지 순례도 활발하다. 충남 내포 지방의 갈매못 순교성지, 공세리성당과 서울의 새남터와 절두산 성지,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 등은 국내 대표적 성지로 꼽힌다. 풍광도 아름답고 순교자의 영성도 되새길 수 있는 곳들이다.

 

한국 교회사에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인 배론은 제천 10경에도 속해 있어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 이유는 황사영(알렉시오)이 신앙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마치 기도하듯 백서를 썼고, 이 땅에 사제를 양성을 위해 성 요셉 신학교가 운영되었으며, 시대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 사제로 12년간 살다 간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와 멀지 않은 묘재에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남종삼 성인의 부친인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유택지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는 임진왜란 당시에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들어와 일본군의 신자들을 돌보았고,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광해군 때 사신들이 들여온 천주교 서적을 통하거나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아담샤알 신부의 만남을 통해 천주실의라는 책으로 학문 전해졌다. 이에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받은 영세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배론에 천주교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 한 것은1791(정조 15)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유교 전통사회였던 조선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빚어진 진산 사건으로 시작된 신해박해(정조 15, 1791) 때로 김귀동 등 신자들이 배론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소재한 산골짜기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것으로, 입구가 좁아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살기 좋아 신앙생활 하기에 적당했다고 하는데 6개 마을로,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에 70여 호가 있었다. 또한, 이곳을 백서로 인한 역사의 땅, 최초의 신학교 교육의 땅,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성소의 땅이라 부른다.

 

황사영(알렉시오)1775년 출생하였으며 179016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조 임금에게 20세 등용약속을 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해 정약종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마리아)과의 결혼으로 천주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황사영은 앞날이 보장된 벼슬길을 버리고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서적을 번역하며 전교 사업을 하던 중 정조임금의 승하(昇遐)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배론 옹기 굴로 피신하여 8개월간 거주하며 초토화된 조선 천주교의 재건을 위해 비단에 쓴 편지백서를 작성하게 된다. 백서에는 박해의 진행과정과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30여 명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순교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교회가 재건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체포되어 26세의 나이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을 당하였고 그의 모친 이윤혜는<거제도>로 부인 정마리아<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서 오씨라는 농부에게 발견되어 대대로 살다가 그 후손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5년 황사영 동상을 현재 배론 성지에 현양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최초의 신학생이자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18213월 충남 청양군 화성면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최경환 성인이며, 어머니는 역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이성례 씨다.

 

최 신부는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최방제, 김대건 신부 등과 함께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1845년 먼저 조선으로 돌아온 한국인 최초의 사제김대건 신부는 병오박해(1846) 당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 피의 순교자로 불린다. 1849년 중국 상하이에서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된 최 신부는 국내로 돌아온 뒤 땀의 순교자란 별칭을 얻었다. 12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땀으로 신앙을 퍼뜨렸다 해서 붙여졌다. 그는 매년 7000(2750) 이상을 이동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이 밖에 서양 신부들에게 직접 라틴어 서한문을 남기고 교리서를 저술하는 등 국내 천주교 사료 수집에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 신부는 40세가 되던 1861615, 장티푸스와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했다. 5개월간 베티에 가매장되었다가 베론으로 이장했다.

교황청은 2016년 최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했다. 가경자란 복자 후보자에게 주는 잠정 호칭이다.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

황사영토굴로 가는 길의 진복문

문루에 쓰여진 글귀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10절의 글귀입니다

황사영의 백서

벽화를 통해 전해진 감동은 여행객들을 대성당 안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조용한 성당 안에서 무릎을 꿇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성하고, 죄를 고백하고, 신의 용서를 구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성모상이 있는 너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미로의 기도' 장소에 오른다. 우리의 삶처럼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가 바닥에 그려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위안을 얻는다. 인생 여정을 압축한 기도문을 가슴 깊이 새기며 배론성지를 떠난다.

'인생 여정에는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