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성지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 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7월30일 성지순례를 떠나는 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를 드리고, 11시 성거산성지를 향해 떠났다. 어제만 해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하늘엔 뭉게구름만 떠있고 날씨는 좋았다. 6년 전 봄, 성당 구역 식구들과 성거산성지를 다녀갔는데 그때는 성지순례 책을 구입하기 전이였고 봄이라 이곳은 ‘야생화의 천국’이였다. 성지 주차장에(510m) 도착하니 발아래 끝없이 펼쳐진 장엄한 대자연이 최고의 아티스트처럼 캔버스 위를 한 치의 빈틈없이 수놓아가는 황홀한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무한대의 가시거리를 확보한 푸른 하늘과 푸른 숲이 선명하면서도 환상적인 미라주를 빚어내는 곳. 성거산성지였다.
성거산 일대는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있었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들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신앙 공동체였다. 성거산이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 이였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에 와서 휴식과 사목 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주변의 공주와 서천, 충북베티, 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거산 출신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 성거산에서 잡힌 배문호 베드로와 최천여 베드로 등 7명이 공주와 청주에서 순교하였고, 1867년에는 배화첨 베드로 등 8명이 서울과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성거산 출신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한 이들도 8위 이상이 된다. 이들 중 공주에서 순교한 이들의 유해가 성거산 줄 무덤에 안장되어 있다.
모든 것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되었다가 다시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겠지만 일단은 苦라고 함이 일반이다. 우리 생에 희노애락애오욕등 오욕 칠정이 끊임없이 자리한다. 그러하지만 그래도 가장 오래 우리 삶을 오래 지배하고 기억되는 것은 ‘苦’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제생활의 3분의 1을 성거산 성지에서 하느님 사업을 펼치시다가 35년간의 사목활동을 마치시고 은퇴하신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그 보잘 것 없던 성거산성지를 봄에는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있고 250여 종의 관상용 들꽃이 군락을 이뤄 사계를 돌아가며 순교의 얼을 꽃피운다. 그래서 야생화는 성거산성지 상징으로 매해 4월이면 야생화 전시 축제를 진행한다.
정지풍 신부님 재임기간에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할 정도의 눈부신 성역화의 완성단계를 눈앞에 둔 거룩한 성지의 입지를 굳혀 놓으셨다.
낮이면 해맑은 바람과 햇살이 송시를 읊고 밤이면 개여울, 붓꽃, 풀 벌래, 들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밀어와 교향악을 맘껏 펼치는 천국. 이 성스러운 성지를 이루시고 가꾸시느라 그 얼마나 많은 고행이 있었을 것인가는 바로 신부님과 하느님께서만 아실 것이니 이를 일러 ‘거룩한 苦行’이라 것이다.
성거산성지 순례 길은 제1줄 무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성모광장, 제2줄 무덤까지 순교자의 길을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오는 길은 매우 수월하였다.
제2줄 무덤에는 정확한 이름이 알려진 5명의 순교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도 분명 이름이 있었을 텐데 무명의 순교자들이 되어 이곳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