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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윤정규 2019. 9. 13. 22:12




 13일 성당에서 10시 한가위 위령미사를 보고 나는 순례길을 떠났다. 햇볕이 따가운 가을의 초입 추석날, 명동성당에서부터 김범우의 집터, 이벽의 집터, 석정보름우물까지 약8를 걸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느림과 여유의 미학을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길은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 모두 종교적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됐다. 청계천을 지나 안국동, 북촌마을 순례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서울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과 근현대 건축물, 빌딩숲이 어우러진 수도 서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국내 천주교회의 산실격인 명동성당은 관광객과 신도들로 붐볐다. 외국관광객들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가을을 만끽했다. 명동성당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늘 높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성당 첨탑이다. 빌딩 숲속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명동성당은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이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한 고딕건축양식에 서양식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이 어우러진 명동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때론 불의에 맞섰던 민주화 성지로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심장으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명례방(明禮坊)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가 유입된 이후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일 뿐 아니라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던 곳이다. 1830(순조 30) 이후에는 선교사들의 비밀 선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845(헌종 11)에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조선교구는 이런 연유로 1883(고종 20)에 명례방 언덕의 일부, 지금의 명동성당 일대를 매입하였다. 매입 당시 이곳은 판서를 지낸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집이 있었다. 윤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부탁받은 지 30년 만에 써주었다는 그 유명한 서예작품 침계의 주인공이다. 그의 집은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87(고종 24)에 본격적으로 성당 신축을 위한 기초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 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한다. 그 까닭은 이곳이 지금의 중구 저동에 있었던 조선 열왕(列王)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의 주맥에 해당한다는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명례방 언덕에서는 궁궐은 물론 도성 안이 훤히 내려다보였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편치 않을 판에 그 자리에 궁궐보다 더 높은 건물이 세워진다는 것은 분명 불경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신축된 성당 건물은 모두 한결같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종교적 위상이나 서양 건축의 입지적 특성을 이해한다 해도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으로 이 사태는 결국 1890년에 천주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공사는 재개되어 그해에 주교관이 먼저 건립되었다.

 

189852일 축성된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키기도 하였고, 자금과 자재난은 물론 공사가 한창이던 1894, 청일전쟁으로 중국인 인부들까지 철수하면서 성당 건립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벽돌이 무르고 또 기술이 부족해서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국군 중앙주교좌성당이 있는 용산 왜고개에 있는 벽돌을 사용하면서 공사 진행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그곳의 흙이 단단한 벽돌을 만들기에 적합했고 또 이곳 공사현장과 가깝다는 이점도 작용했다. 용산 왜고개에서 구워낸 벽돌인 만큼 순교자들의 숨결이 느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한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했으며, 전명 중앙의 단일 첨탑과 좌우 팔각의 소탑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당은 진입로에서 약13m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설수록 높고 웅장하게 느껴지며 건물이 지닌 고풍스런 멋도 돋보인다. 잿빛과 붉은빛의 다양한 이형벽돌로 이루어진 고딕식의 성당 건물은 도심을 잠식하고 있는 차갑고 거대한 현대 건축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각적 아름다움과 이국의 정취를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자 자신의 집에서 교회예절 거행과 교리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한복판에 겨레구원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