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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윤정규 2019. 9. 16. 04:59


마음이 아프고, 머릿속도 복잡하고, 좋은 일보다 나쁜 일만 주변에서 맴도는 것 같고 무엇인가 불안하고 내려놓아야 할 마음의 짐이 많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를 찾아가보면 마음의 평화도 찾고 주님에 대한 믿음도 돈독히 쌓을 기회가 될 것이다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44, 124위 복자 가운데 27위가 순교한 성지로, 한국 교회 단일 순교지 가운데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를 배출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입구는 서소문을 상징하는 `ㅅㅅㅁ'로고와 이승훈(베드로)이 남긴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地盡)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는 글이 양각 부조로 맞이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지하 1층 진입 광장으로 들어서면 십자가와 포승줄, 연못을 형상화한 조각이 서 있다. 지하 1은 편의교역으로 꾸며졌다. 편의 영역에는 안내대와 성지사무실, 기념품 가게 등이 있다. 교육 영역에는 종교 및 일반 서적 1만 권을 소장한 도서관과 강의실 명례방이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지하 2층은 정하상 기념 소성당과 기획 전시실로 돼 있다. 지하 1층이 지적 쉼터라면 정하상 기념 소 성당은 영적 쉼터이다. 여기서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고해성사가 행해진다.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서 반드시 있어야할 공간이다.

 

지하 3층은 콘솔레이션 홀로 꾸며져 있다. ‘consolation’이란 위로, 위안을 뜻한다. 지하 3층까지 연결된 좁은 통로로 들어오는 빛은 죽음이 삶으로 이어진다는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좁고 긴 수로를 따라가다 낮은 유리문을 열면 지하 공간의 종착지인 하늘광장이 나온다. 땅속 깊이 파묻힌 공간이지만 하늘이 뻥 뚫린 텅 빈 광장. 아마도 건축가 윤승현은 이 침묵의 광장에서 죽음이 희망으로, 기념성이 일상성으로 전이되기를 의도했겠지만, 나는 붉은 벽돌 벽의 무심한 물성 위로 쏟아지는 정사각형 하늘의 순수한 공간감에서 위안과 해방을 경험한다. 광장의 벽 한편에는 순교 성인 44인을 상징하는 정현의 조각 서 있는 사람들이 슬픔이나 무거움을 강요하지 않은 채 작품 제목처럼 당당히 서 있다. 어둡지만 밝은 곳, 서소문 역사공원은 일상에 지친 시민들에게 소소한 휴식과 함께 희망을 주는 장소다. 서울 대교구는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11년부터 공원과 역사박물관 조성에 힘써왔고, 8년 만인 올 6월1일 문을 열었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서울에 있었던 4개의 소문(小門) 중 하나다. 동시에, 한양도성의 성문들 중 서대문과 함께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한 성문이기도 하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지명으로 심심찮게 듣게 되는 이름이지만, 서소문이 있던 자리는 작은 표지석이 남아있을 뿐이다. 새로운 역사공원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 얽혀 있는 슬픈 역사를 조명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목이었던 이곳은 죄인을 처형하는 행형장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경각심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새로운 사상을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했던 개혁 사상가, 종교인들의 한이 서린 장소로 더 의미가 각별하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어진 잔인한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서 종교적인 상징성이 특별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가로가 정비되고 철로가 놓이면서 서소문 밖 행형장의 역사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서소문도, 행형장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행형장을 내려다보는 듯이 세워진 약현성당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비극적인 순간들의 목격자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는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 시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984년 이 땅에는 103위 순교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순교자들의 피로세운 신앙의 터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살아있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순교 복자 중에서도 27위가 바로 이곳에서 순교했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내부의 성당, 제대에는 16위 성인의 유해와 서소문에서 44위 위 성인의 위폐 그리고 54위 순교자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226일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 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주자학이 공리공론에 치우치고 도가가 허무맹랑하다고 판단한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 5명이 집행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때 처형된 이들 중에 41명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신앙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그의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 차례 다녀온 유진길과 불과13세의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소년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선교사들이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 전장운의 목이 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향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현재까지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도 100명이 넘는다.

 

역사는 우연일 수 없다. 우리의 복음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말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체포, 투옥,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 서소문 밖에서의 죽음, 이들은 모두 복음의 고리를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섭리요 한국 순교사의 맥이다. 따라서 형리들이 채찍질하는 수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착하게 살고 영생의 복락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걷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삶을 살아왔다면 순교성지 서소문 밖 형장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회가 합심해서 서소문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지하)이 공식 개관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과 함께 위로하고 화합하는 역사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1801년 신유박해부터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중 신원이 확인된 분만 100여명이

된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곳 이다. 정하상 바오로,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등이 있다. 그리고 2014년 시복된 순교자 124위 중 27위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왼쪽 탑에는 44위 성인의 이름이, 오른쪽 탑에는 27위 복자와 27위 순교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마태복음 (2534-40)을 묵상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이곳에서 소외되고 고난받는 이들이 단 한사람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있다. "노숙자 예수상"


칼이붙어있는 조형물이 보이는 이곳으로 내려가면 역사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서 봉사자분이 성지순례 확인 도장을 찍어준다.

나는 한국천주교성지순례 예전 책자와 새 책자 그리고 서울 순례길 모두에 도장을 찍었다.

                                 

지하3층에서 지상의 공원까지 뚫려 있는 구조로, 땅과 하늘이 소통하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의 공간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다. 하늘이 뻥 뚫린 텅 빈 광장. 순교 성인 44인을 상징하는 조각 '서 있는 사람들' 

지하 3층은 '콘솔레이션 홀'  역사박물관에는 수많은 가톨릭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나전칠화<일어나 바추어라> 수녀님이 설명하고있다.

동학교조운동으로 처형된 이들이 기록된 경상감영 계록

103위 성인을 위무함


위로와 위안, 위무를 뜻하는 콘솔레이션 홀은 관람객들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공간이다. 은은하게 흐르는 신비로운 소리와 함께 콘솔레이션 홀을 둘러싸고 있는 네 면에는 멀티 프로젝터를 통해 독특하고도 웅장한 영상이 틀어지고 있다. 이곳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는 잔잔한 힐링을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서소문의 자음인 'ㅅ ㅅ ㅁ' 한줄기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