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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 순교자 성지

윤정규 2019. 10. 21. 23:31




 명례성지를 나와 김범우 순교성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저녁을 먹고 가려고 식당이 있을만한 곳을 찾았지만 동네가 나타나지 않는다. 명례성지가 5km 정도 남았을 때 띄엄띄엄 공장들만 있고 식당은 없었다. 그래서 second house에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삼거리의 큰 공장 옆에 식당이 보였다. 공장 구내식당이었다. 외부 손님도 받는데 가격은 5000원 간단하게 먹고, 식당주인에게 김범우 순교성지 부근에 자동차를 세워놓을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여기 주차장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란다. 새벽에 비 내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second house 천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실로폰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오전 9시 비안개를 맞으며 김범우 순교성지를 향했다. 산허리 끌어안고 돌고 돌아 만어산 정상 670m3분의1 지점에 올라오니 김범우 순교성지가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김범우(1751-1787)는 역관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조선조 영조 27(1751) 음력 423일 서울 명례방에서 부사맹 벼슬을 하던 김의서와 남양 홍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김범우는 스물두 살 때인 영조49(1773)에 국가의 통역관 시험인 역과 증광시에 2등급으로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당대를 풍미하던 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서학이란 신학문을 하던 양반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양반 선비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고 있던 이벽의 인품에 끌려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김범우는 이렇게 한국 천주교회 창설 공로자인 이벽을 따르면서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정조8(1784)에 김범우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입교 절차가 행해졌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토마스로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김범우 토마스는 당시 남인계 실학자인 정약전· 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과 함께 이벽의 집에 드나들며 교리를 배우고 교회 예절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져 안타까워하는 이벽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김범우 토마스는 곧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모임장소로 사용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벽은 이청을 받아들여 정기 집회의 장소를 수표동 자신의 집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1784년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갖게 된 정기 집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기점이 되었다. 이 모임을 기점으로 보고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일이 7일째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여 1784년 늦가을부터 매월 7, 14, 21, 28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리를 공부하며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수표동 이벽의 집이, 이벽과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던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천주교 입교 절차가 행해진 장소라고 한다면, 명례방 김범우의 집은 초기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졌던 곳이라는 점에서 천주교 창립과 확산, 김범우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분제도 아래의 조선사회에서 양반가에 서민이 드나드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서로 쉽게 통교하는 처지도 못되었다. 이러한 제약은 양반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천주교의 포교와 확장에 한계가 되었다. 그런데 김범우의 집은 비교적 통교와 출입이 자유로운 중인의 집이었기에 천주교 확장과 서민에 대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김범우의 집에는 천주실의”, “칠극등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서학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순교자 최인길, 최필공, 김종교 등 중인출신의 인재들이 모두 김범우를 따라서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또 양반들인 홍익만, 변덕중, 윤지충 등이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입교하게 되었다. 1785년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정기집회를 시작한지 몇 달 만에 형조의 순라군에게 발각되었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투옥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김범우가 양반들과 함께 교회예절을 거행했는데 양반들은 돌려보내고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하자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앞서 풀려났던 권일신 등이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우리도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김범우에게만 계속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형벌을 가했다. 이사건을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받은 최초의 박해이다. 중인이었기에 혼자만 문초를 받게된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배교를 끝까지 거부했다. 형조에서는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재촉했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와 굳은 신앙을 꺽을 수 없자 매질하여 귀양 보냈다. 그러나 모진형벌에서 얻은 깊은 상처가 악화되어 마침내 귀양지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의 상처로 죽은 김범우는 한국의 첫 순교자이다.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행위가 순교이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치며 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겐 언뜻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안의 시선에서 순교는 지고지순한 인간 정신의 발현이자 신앙의 절정이다. 특히 온갖 박해 속에서 끝까지 하느님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아 죽음을 맞았던 순교자의 피가 이 땅에 원동력이 되어 한국 천주교의 뿌리가 되었다.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 성지, 동굴성당 입구는 한옥으로 되어있다.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놓은 순교자의 삶을 의미한다. 동굴로 된 성당에 들어서면 세속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묵상하는 시간을 선물 받는 듯하다. 김범우 토마스 성지는 매일 오전 11시 성모동굴성당에서 미사가 있으며 성지 주변에 자연석으로 14처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성모동굴성당 내부



 


기와집 입구로 들어가면 성모동굴성당


성모동굴성당 성모상

김범우 토마스의 묘를 발굴할 당시 순교자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세 개의 돌로 만든 십자가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김범우 순교자 성지 교육관 및 피정의 집 


성모동굴성당 교육관과 피정의 집

김범우 토마스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