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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 성지

윤정규 2019. 10. 24. 03:15





가실성당을 떠나 다음 행선지는 10.3km 떨어진 신나무골 성지이다. 신나무골 성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20분이었다. 어두워서 사진도 찍을 수 없고 성지도 구경할 수 없었다. 성지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 좁게는 칠곡군 지촌면 연화리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왜관의 가실,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교우촌을 포함하기도 한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20km 가량 떨어진 신나무골은 박해시대 교우촌으로서 필수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에서 하루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이룬 이래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이 된 신나무골에는 1860년 경신박해 당시 큰아들과 함께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다. 묘소주위에 새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와 묘소 한쪽에 잘 보존되어 있는 옛 제대가 풍취를 더해주고,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여린 아낙이면서도 장정들 못지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녀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그녀가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가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칠곡의 안양동 선산에 모셔졌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한 것이다. 이선이의 남편인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읍은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을 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쪽으로 쫒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천주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는 죽어도 천주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남편인 배정모는 가슴을 후벼 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신나무골 성지 입구

19일 일요일 11미사에 참석했다.

신나무골 성지 성모상





이선이 엘리사벳 묘와 묘비








신나무골 성지 김보록(로베르)신부상



엘리사벳 묘역의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