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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성지

윤정규 2019. 11. 16. 20:45



 전동성당을 나와 치명자산 성지로 향했다. 전동성당에서 전주천변으로 2km 거리다. 6분이 걸린다. 치명자산(중바위산) 정상은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부부 유 요한과 이 루갈다를 추양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주 시내를 굽어보는 중바위는 전주 8경중 손꼽는 기린봉 능선에 위치해 호남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19849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 아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둘째아들 유문석 요한과 조카 유중석 마태오,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등 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4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이어 1949년 전동성당 신자들은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세웠다. 유항검은 1784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천주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위임을 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에 내려와 호남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공을 세웠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을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 형을 언도 받고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해 1024(음력 917) 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복동생 유관검에 이어 1114(음력109) 두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그리고 다음해 131(음력 18011228)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 제수 이육희가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죄인의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기저택의 형을 내렸다.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신앙의 후손들은 그 흘린 피의 대가로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유항검 일가의 고결한 신앙을 굽이진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며 되새기는 것이다.

 

순교자 묘소에서 바라본 전주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

11시 미사에 참석했다. (임시 가건물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