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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

윤정규 2020. 5. 3. 01:29

 

 

성 남종삼 유택지를 나와 용소막 성당으로 가면서 3대가 같은 해에 처형된 것에 매우 가슴이 아팠다.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일까? 죽음이 어느 인간에게 두렵지 않을까? 남종삼은 좌승지의 높은 벼슬까지 버리고 배교하지 않고 처형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사이에 어느 덧 자동차로 20여분 달려오니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오른쪽 산 아래 용소막성당 건물이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은 하늘을 고스란히 담는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빛이 달라지면 물빛도 달라진다.

 

쏟아지는 햇살이 하늘을 그대로 담으니 성당 전체가 녹색이다. 완연한 봄 풍경.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일까. 매우 외롭다. 아무런 인적도 없다. 이맘때면 용소막 성당 성지도 천주교 신자들로 붐비던 곳일 것 같은데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봄을 앗아갔다. 그러니 봄은 왔지만 우리들 가슴에는 아직 봄이 아니다. 본당 건물 정문 앞에 들어서니 “5월5일 까지 성당 및 부속건물은 열지 않습니다.”라고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성모상 앞에 꿇어앉아 성모님을 바라보니 성모님도 밝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창기 모진 박해의 시대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강원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은 횡성의 풍수원 성당이다. 두 번째는 원주성당(현 원동주교좌)이며 세 번째가 용소막 성당이다. ‘신들의 숲’이라는 신림면(神林面),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신들이 내려와 관리하던 땅에 용의 형상을 한 용소막 마을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살던 신자들이 하나 둘 용소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3년 무렵이었다. 그들은 용소막에서 원주본당 소속 공소(公所)로 모임을 시작했고, 1904년 5월 4일 뮈텔 주교가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용소막성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용의 발 위에 초석을 놓은 10칸 규모의 초가집이었다.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했다. 신자들은 장마 때 물길을 이용해 주변 배론산, 학산, 치악산 등지에서 목재를 옮겼고 지역의 흙으로 벽돌을 구웠다. 그렇게 1915년 현재의 모습과 같은 벽돌조 양옥 성당이 완성되었다.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했다. 1943년 대동아전쟁 때 일제는 성당에 있는 쇠붙이를 모두 빼앗아 갔다. 종은 물론 제대와 회중석을 구분하던 난간까지. 6·25전쟁 때 피해는 더 컸다. 성당은 인민군들의 식량창고가 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의 문서도 모두 불에 탔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당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성당의 좌측에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있다. 용소막성당 출신 선 신부는 성서학자로서 서울 가톨릭대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부유한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선 신부는 인간적인 소망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주길 간절히 원했던 부친의 애원을 물리치고 사제의 길에 오른다. 신학생 때, 교수 신부로부터 한국교회는 성서학의 불모지라는 말씀을 듣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용소막성당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의 원문을 번역한 성경학자다. 1962년에 폐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내용 중에는 자국어를 사용한 미사의 허용과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교회의 연합 등이 있었다.

 

이때부터 세계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어로 단독 번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최초로 창세기가 출판된 것이 1958년이었다. 한편 그는 1960년에 수녀회를 설립했는데 당시 수녀원 지원 시 필수 조건이었던 ‘학력’에 대한 제한을 없앴다고 한다. 그의 이념은 노동에 근거한 철저한 자립과 봉사였다. 1968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가톨릭교회와 개신교들과의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일환으로 성경을 공동번역하게 되었다. 구약을 번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 즉 고고학·히브리어·희랍어에 능통한 이는 가톨릭 측에서는 유일하게 선종완 신부였다.

 

1976년 7월 11일, 간암으로 선종하기 며칠 전까지 공동번역 원고를 마지막 한 장까지 탈고하느라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선 신부의 이러한 사투를 거쳐 완성된 공동번역 성경은 그의 선종 1년 후, 1977년에 출판돼 2005년 가톨릭교회에 새 성경이 나올 때까지 가톨릭과 개신교회에서 공동으로 사용됐다. 그의 유언은 합심, 인내, 가난, 봉사, 그리고 겸손이었다. 유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한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이 보관되어 있다. 유물관 뒤쪽으로 피정의 집과 교육관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성모동산이 펼쳐진다. 언덕은 용의 머리 부분이다. 살금살금 용의 머리를 밟고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로 불리기도 하는 ‘십자가의 길’을 지나 성모동산으로 오른다.

 

환하고도 고적한 숲길이 일단의 마루에 올랐을 때 너른 숲 광장 한켠에 선 성모상을 만난다. 용소막성당의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한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믿음과 용기와 치유의 감정은 성모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기적일까. 성당 마당에 다섯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150년이 되었다는 나무는 성당보다 먼저 이곳에 서 있었고, 성당과 함께 참혹한 시대를 살았고, 이제 성당을 수호하듯 건강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성서번역에 몰두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1915~1976)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