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을 다녀와서...
9월17일 세계일보 사장님을 비롯해 임직원과 조사위원 10여명이 1사단장의 초청을 받아 판문점을 방문했다.판문점은 한국전쟁 발발 1년만에 개시된 정전협상 초기, 널문리 주막 자리에 만들어졌다. 6.25 전쟁당시 휴전회담이 열렸던 원래의 회담장소는 현재 위치에서 1㎞ 정도 북쪽에 있었으며, 네 채의 초가집과 회담장으로 쓰였던 가건물 두 채, 세 채의 조립식 막사가 건물의 전부였다.판문점이라는 명칭은 휴전회담 장소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이 회담에 참석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보게 하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店)를 한자로 적어 "板門店"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한다.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다고 해서 널문리로 불렸던 조용한 마을은 전쟁이 아니라 휴전회담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예비회담이 시작된 이후 장장 2년 19일 동안 총 1백59회의 본회담, 1천76회의 각종 회합을 거치며, 지리하게 진행되던 정전협상은 53년 7월 27일, 마침내 끝을 보았다. 협상을 시작한 지 2년 19일만의 성과였다. 그리고 널문리 일대에는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를 감시 감독하는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 본부가 들어섰다. 군정위를 구성하는 유엔사령부와 조선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 소속 장병들이 이 지역을 공동으로 경비했다. 민족분단의 상징이자 냉전체제의 정치1번지 판문점은 이렇게 태어났고, 분단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이다. 현재는 남북대화의 장소로 이용되며, 군사정전회담이 열리는 곳이다.
본래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청송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지만, 현 북한측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판문군 판문점리이다. 위도상으로 이른바 38선상에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 됐다.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은 처음에 개성에서 시작했으나, 더 중립적인 장소를 찾다가 개성에서 20리 떨러진 이곳 널문리 콩밭에 대형 천막을 치고 협상을 계속했고, 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상을 맺으면서 조그만 널문리 콩밭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자리게 되었다.
널문리는 언젠가 서울에 다녀가던 중국사신이 이 마을에서 술 한잔을 얻어먹은 것이 이곳을 주막거리로 만들었고, 이후 서울과 개성을 오가던 길손들이 잠시 숨을 돌리던 곳으로 정착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사령부 측 정문 초소를 지나면 여러 채의 건물들이 보인다. 직경 8백m, 총 15만평의 공동경비구역 중심에는 7채의 콘센트 막사가 있는데, 이 중 가운데 것이 군정위 본회의장이다. 그 옆으로 하늘색 막사가 유엔군 측 사무실이며, 회색은 북한측이 사용한다. 다른 건물들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숙소, 경비부대 막사, 그리고 경비초소들이다.
판문점의 북쪽 절반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것이다. 원칙적으로 공동경비구역 남쪽 절반은 유엔군 사령부의 관할 하에 있지만 남쪽의 사정상 주한미군이 유엔군의 역할을 거의 다 수행하기 때문에 판문점 남쪽 지역은 실제로는 미군의 관할 하에 있다.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 개성시로부터는 10Km 떨어져 있다.
세계일보사장님과 임원들이 1사단장과 함께...
북한측에서 판문점 관광 온 모습
판문점 회의장 모습
1976년 8월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군인의 도끼에 맞아 즉사한 사건이다. 위의 사진이 그 때 미루나무가 서 있던자리
돌아오지 않는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