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와 사라고사를 가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호텔에서 조식 후 오전8시 유럽의 제3대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라 서울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90%의 자동차가 소형 자동차라 밀리지 않고 프라도 미술관에 30여분 만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 보니 내일 스페인의 국경일이라 행사준비를 하느라 한쪽 차선을 막고 있었고 기아의 모닝자동차도 많이 보였다.
프라도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 가이드의 말이 사진촬영 금지란다. 군데군데 경비들이 있었지만 사진촬영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미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있다. 천하의 달리가 그의 작품 옆을 지날 때마다 질투심에 불타 눈을 가렸다는 바로 그 보쉬. 그의 상상력은 남달라서, 그의 작품 [세속적 쾌락의 정원]은 서양 미술 전체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고, 또 가장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기도 하다.
펠리페 2세가 그의 팬이었던 덕분에 프라도 미술관은 보쉬의 패널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가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만끽하려면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 정석이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미친 돌의 추출]도 볼 수 있다. 1475년에서 148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작품은 미친 사람의 머리에서 광기의 돌을 꺼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상징물을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탁자 위의 구근이다. 미친 사람의 머리에서 꺼낸 것은 광기의 ‘돌’이 아니라 바로 이 ‘구근’인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구근이 바로 광기의 상징이라고...
그리고 세계 최초의 누드화 ‘옷을 벗은 마야’에 대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직까지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옷을 벗은 마야’는 벌거벗은 여인이 정면으로 직시하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이 그려질 당시 스페인은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있었고 이에 누드화 자체가 금기 시 됐다.
하지만 그림을 그린 화가 고야는 악명 높고 가혹한 종교 재판에도 불구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리며 사회에 정면 도전했다.
당시 '옷을 벗은 마야'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림 속 주인공 때문 이었다. 이전 누드화는 신화나 성경에 등장한 여신들이었고 그들은 수줍은 표정과 나체를 감추려는 미묘한 포즈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마야는 신이 아닌 여성인데다가 몸의 어느 한 부분도 가리지 않고 당당하고 도발적인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때문에 사회의 이단으로 몰려 종교 재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재판에 회부된 그는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왜 그림을 그렸냐. 그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고야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제가 사랑했던 여인 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끔찍한 고문과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야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고야가 죽은 후 스페인 전역에는 그림과 마야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그림 속 마야가 누군가의 애첩이다, 고야의 상상속여인 이다 는 제각각의 루머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지만 이 후 의외의 인물이 지목돼 스페인을 또 한 번 주목시켰다.
'옷을 벗은 마야' 주인공 마야가 알고 보니 스페인 최고의 명문 귀족 알바 가문의 공작부인이라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보석이라는 찬사까지 받을 정도로 대단한 여인이 누드화의 주인공에다 천한 화가 고야의 연인 이라는 소문은 스페인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를 뒷받침 하는 여러 가지 근거가 제시됐다. 공작부인을 그린 그림들 속에 마야와 고야가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는 힌트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로 인해 알바 가문은 논란 속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알바 가문은 사진 속 인물이 마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묘까지 파헤쳤지만 의혹만 증폭시켰다.
하지만 스캔들로 인해 '옷을 벗은 마야' 그림은 신화격 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됐고 현재까지도 '최초의 누드화'라고 불릴 만큼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불카노의 대장간을 가이드로부터 그림설명을 듣고 나니 촬영하고 싶은 마음 꿀떡 같았지만 마침 톨레도에서 산 그림책에 두 사진이 있기 때문에 참았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으로 17세기 스페인 화단의 최고 작가로 손꼽히는 화가 그는 1599년 세비야에서 태어났으며 1660년에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에는 실제의 사진을 방불케할만한 탁월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그림등을 많이 볼 수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약50여점의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펠리페 4세와 그의 가족들을 그린작품 들이다.
감명 있게 보고도 사진 촬영을 못해 뭔가 하나 잊어버린 것처럼 아쉬운 마음으로 프라도 미술관을 나와 마요르 광장으로 이동했다.
마드리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17세기 광장인 플라사 마요르는 사실 수많은 광기의 피가 겹겹이 스며 있는 곳이다. 한때는 투우장으로, 또 한때는 사형장으로, 그리고 한 시절은 종교재판장으로 쓰였던 이곳은 인간의 광기를 증명하는 곳이기도 하다.
1480년부터 스페인에서 있었던 종교재판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단일한 카톨릭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종교재판은 곧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개신교 이단자, 카톨릭으로 거짓 개종한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종교재판의 대상이었는데, 로마 교황의 대칙서를 받아 종교재판관이 진행한 이 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재판이었다고는 해도 피고인에게는 변론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판결의 결과도 알려주지 않았다.
고문과 자백이 있을 뿐이었다. 처벌의 형태는 다양했다. 징역, 참수형, 교수형, 화형. 희생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토록 피로 얼룩진 광장은 현재 과거를 잊고 평화로운 관광객들의 집합지가 되어 있다.
마드리드에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사라고사로 향했다. 한 도시를 하루만 머물고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하루 평균 이동거리가 400㎞에서 500㎞ 정도인데 차만 타면 모두가 졸기에 바쁘다.
낮잠 시간인 시에스타(siesta)를 친구로 삼은 것 같다. 한 체력을 과시하던 나도 창가 너머의 풍경을 옆으로 한 채 졸고 있고, 벌판의 올리브나무도 살랑거리는 바람의 유혹에 고개를 흔들고 있다. 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 안이나 차 밖 모두가 달콤한 잠에 푹 빠져 있었다.
4시간 버스를 타고 사라고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5시경이다. 사라고사는 스페인의 도시 중에는 우리에게 상당히 생소한 곳이다. 그렇지만 사라고사를 구경하지 않고 지나쳤다면 엄청 후회했을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시간만 되면 다시 방문할 충분히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그리고 그 매력을 더해주는 것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들 필라르 성모 대성당과 바로 옆에 있는 라세오 대성당이다. 성모마리아 출현지라는 필라르 대성당은 서기40년에 이 땅을 방문한 성 야고보 앞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기둥하나를 건네며 이곳에 성당을 지을 것을 명하여 그 기둥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어진 성당 이라한다.
버스가 필라르 대 성모성당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아~아 소리가 연속 나왔다. 유럽의 대성당 모두가 웅장하고 멋있지만 필라르 성모 대성당은 또 다른 멋을 나에게 선사했다. 바로 앞 시내를 가로지르는 에브로강가에 있는 필라르 대 성모성당은 야경으로 강물에 비추는 모습이 그림엽서의 한 장면 같았고 그런 모습에 나는 필라르 대 성모성당을 넋 나간사람처럼 연신 카메라 셔트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진정한 매력은 외관이 아니라 화려한 내부에 있었다. 아쉽게 화려한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란다. 마침 성당 안에 들어가니 미사 중 이였는데 성가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료되어 붕붕 날아 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성당의 성가대도 잘한다고 미사 중에도 박수를 친다. 그런데 필라르 대성당의 성가대는 1급 성악가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채색타일로 장식된 중앙대형지붕이 압권이며 이를 중심으로 11개의 지붕이 있고. 당 안의 천정에는 많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중 일부는 이 지역 출신인 고야가 젊었을 때 그린작품이다.
다음날 10월12일이 신대륙 발견 날로 스페인 국가로서는 제일 큰 국경일이라 필라르 광장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전야제 축제를 보기위해 나와 있었다. 아마 사라고사 전체인구의 80%는 필라르 광장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플라사 마요르 광장
사라고사의 대 성모성당
마요르 광장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동상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