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일이니 아득하긴 하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 위기가 무르익던 1938년 9월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토해낸 첫 일성이 “이제 전쟁은 없다”는 거였다. 그는 "독일로부터 평화의 소식을 가져왔다. 이제 평화는 우리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잘 주무시라"고 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에게 끊어준 수표는 체코의 영토였다. 그것으로 일단 독일의 공습으로부터 영국인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평화유지 정책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뮌헨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6개월 뒤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손에 넣고, 이어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6월15일 평양정상회담을 마치고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했다. 성남서울공항 대국민보고문, 임시국무회의, 그해 9월 유엔총회에서 거듭 말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북측도 전쟁을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로 든 게 “저녁 만찬 때 북측의 군 고위 간부들이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나왔고 모두 나에게 와서 인사를 했다”는 거였다. 그는 “이것은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말해 주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순진함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다.
체임벌린은 그나마 남의 나라 땅을 떼어주고 평화를 얻었지만 김대중은 현금으로 평화를 거래했다. 현대그룹이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불법 송금한 돈은 4억5천만달러나 된다. 베이징 협상에서 북한의 행태는 칼 든 강도나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정부의 조급함을 간파하곤 하룻밤사이에 가격을 1억5천만달러나 더 올리는 갑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금강산 관광 달러박스 등을 통한 뭉치돈은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 자금이 돼 한반도를 얼마 전까지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는 시드머니였다. 김대중정부 사람들은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고 국민을 속였을 뿐이다.
김정일이 김대중과의 합의를 깨는 데는 2년이 걸렸다. 2002년 한일축구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29일, ‘평양의 밤에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인사를 했다’는 그 군 고위간부들이 서해 NLL을 침범해 기습 공격을 자행했다.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김대중이 평화를 돈으로 사기 전인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피해가 경미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외치고 다닌 이후 피해가 엄청나게 큰 것은 무얼 말하는가.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긴장을 놓고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평화는 힘에 의해 지켜진다. 그는 ‘전쟁을 막는 국가안보’라는 기이한 논리를 강조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안보관은 결과적으로 해군의 피해만 키우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를 것인가. 문 대통령은 상기된 표정으로 19일 평양 9월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됐다. 남과 북은 오늘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없애기로 합의했다”라고 발표했다.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은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했고 문 대통령은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됐다”고 하고 있다. 그 말이 그 말이지만 오늘 상황은 더 위중하다. 북한은 김정일 때와 달리 아들 김정은 대에 이르러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지만 건망증이 심한 우리는 어느덧 본질을 놓치고 있다.
당장 미국이 북한 핵사찰에 대한 검증을 시작해도 원만하게 비핵화가 잘 된다는 보증은 거의 없다. 과거 사례를 보면 예상치 않은 국면에서 위험한 고비가 생긴다. 유엔주재의 대북 경제 제재망을 뚫고 ‘우리끼리’ 거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공짜는 없다. 김정은이 우리에게 제시할 빚문서엔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혀 있을 것이다. 장밋빛 환상 속에 이처럼 어두운 그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철없는 TV방송은 벌써 통일이 다 된 것처럼 북한에 KTX를 놓으면 북한과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금강산 관광에 나설 날이 머지않았으며, 직항로로 백두산을 오를 감상에 젖어 김칫국을 퍼붓고 있다.
적장 앞에서 현직 국방장관은 귀신 잡는 해병대를 노가다 정도로 취급하는 허접한 농담을 던지고 청와대 참모는 피로 지켜온 서해 NLL지역을 양보해서라도 평화의 깃발을 꼽는 데만 급급하다. 청와대는 앞서서 흥분하고 희망을 과대 포장하는 어리석음을 그쳐야 한다.
평화가 귀중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안보를 누군가의 선의에 맡기다간 나라를 들어먹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