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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미리내 성지

윤정규 2019. 6. 17. 21:34

성 김대건 신부 유해를 처음 모셨던 경기도 안성 미리내성지는 이름부터 참 멋있다. 지금이야 길이 잘 뚫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 됐지만 200년 전만 해도 이곳은 그야말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이었다. 박해를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삼삼오오 모여 살았던 신앙선조들, 밤이면 그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 바로 은하수의 순 우리말인 '미리내'.

 

성지에 도착하니 우선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산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성지가 그만큼 넓고 포근하다. 답답한 도시에 사는 신자라면 가슴 속 응어리가 저절로 녹아내리는 기분일 것이다. 공기는 또 얼마나 달고 상쾌한지 모른다.

성지 입구에는 '미리내성지'라는 표지석과 함께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임은 가시고'라는 시비가 순례객을 맞는다. 시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은 가시고 진리는 왔습니다. 피로써 가꾼 땅에 무궁화 피나이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향기 가득합니다."

 

짧은 몇 마디 글이지만 의미가 그윽하다. 오늘날 삼천리 방방곡곡에 가득한 복음의 향기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새삼 일깨우며 이곳을 순례하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한다.

 

성지는 입구에서 정면 광장을 지나 곧장 걸어가면 나오는 김대건 신부 묘소와 입구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나있는 게쎄마니 동산을 중심으로 하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오른쪽 언덕길을 오르는 길을 잡았다. 김대건 신부 묘소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할 뿐 아니라 미리내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만큼 맨 나중에 순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오른편 언덕에는 게쎄마니 동산 말고도 들를 데가 많다. 올라가면서 차례로 둘러보는 것보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다음 내려오면서 차분히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 힘이 덜 들 것 같아 먼저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

마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내려오는 수녀님을 만나 게쎄마니 동산에 대한 위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원하고 조용한 푸르른 숲길이었다.

꼭대기는 게쎄마니 동산이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자고 있는 제자들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는데, 평소 신앙생활이 게으른 탓인지 아무 생각 없이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남 같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성지 인근에 흩어져 있던 무명 순교자 유해를 한데 모은 16위 무명 순교자 합장묘와 함께 '성인 요한 이윤일 천묘(遷墓) 사적비'가 있다.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윤일 성인도 원래 여기 묻혔는데, 대구대교구가 이윤일 성인을 현양하면서 1986년 성인 유해를 관덕정으로 모셔감에 따라 사적비를 남겨 이를 기념하는 것이다.

 

무명 순교자 묘 바로 아래는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이다. 아는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오랫 동안 수원교구장을 지내며 교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김남수 주교(19222002)와 성라자로마을 원장으로서 나환우들의 둘도 없는 벗이었던 이경재 신부(19261998)를 비롯한 수많은 사제들이 거기 누워 있었다.

층층으로 돼 있고 위에서부터 채워 내려오는 성직자 묘역에는 4개 층이 빈 채로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곳에 묻힐 수원교구 사제들을 위한 것이다. 사제들이 1년에 한번만이라도 이 묘역에 들러 일평생 하느님만 따르다가 이곳에 잠든 선배 사제들과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면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그보다 더 좋은 영성수련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어디 사제뿐일까. 그 누구든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언젠가는 죽어서 저렇게 흙 속에 묻힐 인생, 하느님 앞에서 부끄럼 없도록 그분 뜻만 좇아 살다 오라는 고인들의 가르침이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미리내가 성지인 가장 큰 이유는 순교자 김대건 성인 묘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들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18211846) 신부.

 

성지 입구에서 성지 왼쪽 구석 끝에 있는 김대건 성인 묘까지는 사실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이다. 하지만 617일 한낮의 뙤약볕은 무척이나 따가웠다. 차를 타고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차가 못 들어가게 입구에서 막고 있었다. 설사 차를 들여보낸다 하더라도 차를 타고 횡하니 가는 것은 성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 듯싶었다.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성인을 만나러 가는 데 그깟 조금 걷는 것이 대수일까.

 

너른 광장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서 빙 둘러 왼쪽 끝에 있는 묘소까지 걷는 20여분은 둘도 없는 산책길이다. 한적할 뿐더러 차 피하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날씨가 좋든 볕이 뜨겁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는 것보다는 신자답게 뭔가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걷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묵주기도 각 단을 돌에 형상화시켜놓은 조각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 그렇지! 기도, 특히 묵주기도 하면 우리나라 신자들이 가히 세계 대표 급 아닌가.

 

묘소까지 길목 길목에 서 있는 묵주기도 조각들을 지나며 묵주기도 5단을 다 바칠 때쯤이면 김대건 성인 동상이 순례객을 반갑게 맞는다. 묘소 입구라는 표지다.

 

동상을 뒤로 하고 김대건 성인 묘소 쪽으로 올라갔더니 너른 소나무 숲이 나왔다. 땡볕에서 한참 걷느라 너무나 그리웠던 그늘이다. 공터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선 소나무 숲 아래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자니 별천지가 따로 없다. 김대건 성인의 넋이 깃들어서일까. 성인의 묘소와 경당 앞에 있는 소나무 숲은 순례객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편안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힘을 지녔다. 그냥 쉼터로 봐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자연 공원이 바로 경당 앞이다.

 

1928년에 완공된 김대건 성인 경당은 또 얼마나 아담하고 예쁜지 모른다. 하얀 벽돌에 빨간 지붕. 한 폭 수채화 같은 경당이다. 경당 안으로 들어가자 김대건 신부 발 뼈 유해에 입을 맞추었다.

경당 구내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 등 모두 네 분의 묘가 나란히 있다. 김대건과 최양업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18631928)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죽을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지금의 경당을 건립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1845년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페레올(18081853)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최문식(18811952) 신부는 한국교회 19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낸 분이다.

 

잘 모르고 이곳을 찾은 이는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경당에 있는 김대건 성인 묘는 사실 빈 무덤이다. 성인이 순교한 곳은 서울 용산의 새남터. 성인 유해가 고향도 아닌 이곳 미리내로 모셔진 연유는 순교 40일 후 성인 유해를 거둔 이민식(빈첸시오, 18291921)의 고향이 바로 미리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 미리내 성지를 있게 한 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 유해는 1901년 서울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60년 다시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에 안치하는 과정에서 하악골(아래턱뼈)만 분리해서 미리내성당으로 옮겨왔다. 결국 온전한 성인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었던 기간은 1846년부터 1901년까지 55년간이라고 볼 수 있다.

 

경당 왼편에는 성인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다시피하며 눈물겨운 삶을 살았던 고 우르술라는 이민식에 의해 아들 묘 옆에 모셔져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풀었다.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묘를 보살피던 이민식도 92살까지 장수하다가 성인 옆에 묻혔다. 그야말로 선종(善終)했을 것이다. 미리내는 김대건 성인이 처음 묻혔던, 그래서 그분의 얼을 되새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김대건 성인과 관련된 많은 이들의 삶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성지이다.

 

묘소를 둘러보고 나올 때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쪽 길을 택했다. 미리내성지를 소개하는 사진이나 책자를 볼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요새 같은 건물이 1991년에 세워진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다. 성당 1층에는 103위성인들 이름을 한명씩 적은 휘장이 빙 둘러싸고 있으며, 2층에는 순교 장면과 형구들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다. 순교의 고통을 절절이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 꼭 한번 둘러볼 만하다.

 

청동으로 만든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 다시 성지 입구에 이르렀다. 광장을 중심으로 성지를 한 바퀴 돈 셈이다. 스피커에서 잔잔한 성가가 흘러나왔다. 순례 객을 배웅하는 김대건 성인의 포근한 음성인 듯했다

성가를 들으면서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와 124위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쳤다.

 



 


♪ 가톨릭성가 286번 / 순교자 믿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