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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지

윤정규 2019. 7. 5. 23:10

평소보다 일찍 730분에 일어나 창문 밖으로 날씨부터 확인했다. 공기도 깨끗한 7/4()아파트에서 본 하늘은 뭉게구름 사이로 파랗게 보이고 있다. 이런 날씨면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성지순례를 떠나 보는 것도 주님의 은총이 아닐까? 나는 망설임 없이 예수성심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12일 예정으로 구산성지, 양근성지, 마재성지, 양주순교성지. 성 남종상의 묘, 황사영의 묘, 그리고 인천교구 관할인 강화도의 갑곶성지, 관청리 형방과 진무영,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아홉 곳의 성지순례 계획을 세우고 오전9시 구산성지로 향했다.  

 

90년대 닭도리탕 먹으러 갔던 미사리가 기억난다. 그 많던 7080카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크고 작은 카페가 수십 개가 이어지는데 모두가 라이브 공연하는 곳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하남 강변미사지구 개발이 한창 진행되면서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신축 아파트들의 숲 사이, 개발예정지역의 황폐한 공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성당이 외롭게 서있다. 성당의 이름은 구산성당.

 

구산성당과 그 주변지역은 한국 천주교사는 물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기도 하다. 교수형을 당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순교 성인 김성우(안토니오)의 생가터인 동시에 김성우(안토니오)가 한국 최초의 서양인 신부인 모방 신부를 은신하도록 했던 곳이다.

 

모방 신부는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은거하며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웠다. 김대건(안드레아)을 교육시키고 마카오 신학교로 보내 한국 최초의 신부로 만든 분이다. 구산성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은 한국에선 매우 유례가 드물게 신앙 공동체인 동시에 마을 공동체가 200년 간 유지됐던, 도시역사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구산성당은 초기 공소가 있던 김성우(안토니오)의 생가 터 인근에 1956년 지어졌다. 건물은 지어진지 60년 정도지만 터는 180년 전부터 초기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교인들에겐 의미가 남다른 장소다.


아담한 규모의 고풍스런 양식으로 지어져 '에덴의 동쪽'아내의 유혹, 너는 내 운명' 등 다수의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도 사랑받았다. ‘공소란 성당보다 작은 단위를 뜻하는데, 주임 신부 없이 신도들만으로 운영되는 곳을 뜻한다. 사실 한국 천주교 역사 200년 가운데 절반 이상은 성당 없이 공소로만 운영된 공소시대였기에, 한국 천주교 역사의 모태는 공소라고도 할 수 있다. ‘공소의 역사가 길다는 것은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범한 신자들이 자신들 노력으로 종교의 자유를 지켜낸 기간이 그만큼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산성당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로 180년 전 공소로 시작해서 구한말 갖은 종교박해를 꿋꿋이 이겨낸 마을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나르고 벽돌을 만들어 꼭 60년 전인 1956년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닌, 그 공간을 실제로 향유할 이들이 직접 공공의 종교적 건축물을 짓고, 또 그 건축물이 온전하게 반세기 이상 남아있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구산성당을 직접 지은 주민들은 구산성당을 짓기 전에 명동성당과 서소문 약현 성당 건립까지 직접 도운 이들이다.

 

구산성당은 마을 주민들이 돌 하나, 모래 한 사발을 직접 비벼서 벽을 쌓고 지붕을 세워 만든 굉장히 진정성 높은 근대유산인 것이다. 명동성당을 짓는데 구산성당 사람들이 직접 가서 일을 하셨고, 그 다음에 약현성당을 비롯해서 천호동 성당 등 (구산성당 신도들이 성당 건설에 직접 참여하면서) 우리나라의 도시화 전 과정을 이 성당이 체험한 거란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천주교()’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도시歷史(역사)’ 측면에서 의미 있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환갑이라고 축하를 받아야 할 올해, 이 성당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하남시 미사강변지구 개발권에 포함되면서 철거가 확정됐기 때문입니다. 순교성인들의 묘소가 있는 인근의 구산성지는 미리 문화재 지정신청을 해 화를 피했지만, 구산성당은 문화재 지정을 머뭇거리는 사이 개발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60년 전 직접 한강에서 채취한 모래와 자갈을 시멘트로 비벼 자신의 손으로 성당을 지은 구산성당 신자들은 언제 헐릴지 모르는 성당 걱정에 요즘은 아예 성당 앞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미 개발권자인 LH는 이곳에 아파트형 공장 건설을 확정한 상황. 단 하나 희망은, 구산성당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당을 등록문화재로 선정해 보존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성당을 허물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 그대로 이축해 이전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구산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는 방법은 그 공간에 그대로 남겨놓는 것이 최선이지만, 불가피하다면 이축을 하더라도 성당의 철거나 훼손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구산성당은 단순한 종교건축물이 아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국 민중들이 스스로 종교의 자유를 일궈낸 숭고한 업적을 증명하는 동시에, 6. 25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공동체의식으로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건축물을 민중 스스로 만든, 근대 역사에 있어서 자랑스런 이정표이다. 구산성당을 그대로 두고 새롭게 대형 아파트촌이 들어선다면 옛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되면서 더 큰 건축적 공간적 보물을 가질 수 있을 것인데, 결국 성당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순례 확인도장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