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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성지

윤정규 2019. 7. 10. 17:06

오후7시경 황사영 알렉시오 묘에서 강화 갑곶성지로 출발했다.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다가 김포IC에서 나와 강화 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배가 고파 통진읍 도로가변차선에 차를 세워 맛집을 검색했더니 300M앞에 가마솥 설렁탕집이 있어, 마침 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이라 찾아갔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심플한 분위기이며 홀도 매우 넓었다. 설렁탕을 시켰는데 먼저 깍두기와 배추김치가 나와 맛을 보니 맛집 같았다. 설렁탕도 진한국물에 소고기도 냄새 없이 깔끔했다. 갑곶성지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9시경이었다. 세컨하우스에서 평화롭게 누워 하늘을 보니 집에서는 보이지 않은 별들이 쏟아질 것 같이 저마다 빛을 내뿜고 있다.

 

8시에 일어나 누룽지로 아침을 해결하고 11시 미사참석 전에 성지를 둘러보려고 나갔다. 갑곶성지는 조명연 마태오신부께서 본당신부님으로 계신 곳이다. 신부님께서는 1대 본당신부님으로 오셨다가 지금 7대 본당신부님으로 다시 오셨다. 몇년 전 구역의 형제 자매님들과 갑곶성지를 다녀갔는데 오늘 다시와보니 다른 느낌이 든다.

 

회원 2만 명을 거느린 인터넷 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는 조명연 신부는 명강사이자 글을 잘 쓰는 힐링 멘토(healing mentor)로 유명하다. 그가 최근 "나보란 듯 사는 삶" 이란 책을 냈다종교는 돈을 더 많이 버는 법이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 시대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조 신부는 `빠다킹 신부`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조 신부는 이 별명 덕분에 신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성직자가 됐다고 믿는다. "20년쯤 전 보좌신부 시절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한 중학생이 `솔직히 신부님 목소리 너무 느끼해요. 빠다(버터) 같아요`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조 신부님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봤더니 역시 느끼하더래요 그런데 그게 잘 안 고쳐져 아예 `빠다킹 신부`가 되기로 했고 그 단점을 조 신부님을 대표하는 개성으로 만들었답니다."

 

이날 11시 미사에 빠다킹 조 신부는 강론시간에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축일인데 김대건 신부님이 신부가 되어서 몇 년 만에 돌아가셨냐고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한다. 한 꼬마가 6년입니다. 라고 하니까 꼬마에게 다가와서 초코렛 한 봉지를 준다. 그리고 다음 아시는 분, 한 자매님이 3년이라고 한다. 빠다킹 조 신부님은 자매님 곁으로 가서 또 초코렛 한 봉지를 건네준다. 정말 재미있는 신부님 이였다. 김대건 신부는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약8개월 만에 순교하였다.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세기 한국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하게 갈등을 빚은 곳이기도 하다. 또 서양 선교사들이 은둔의 땅 조선을 처음 접한 곳 중에 하나다. 그래서일까, 천주교사의 초기 발자취를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천주교 선교 초기에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돼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그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갑곶순교성지.

 

 

강화도 갑곶 해안은 조선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경유지였다. 땅 끝 조선에 눈을 뜬 천주교 성직자들이 1850년 중순 강화도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천주 복음이 전국으로 전파된다. 당시 실권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때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조선 정부의 책임을 물어 바로 이곳 갑곶 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다. 추후 프랑스군은 후퇴했지만 이로 인해 강화에서는 천주교회의 가장 극심했던 박해의 하나로 기억되는 병인박해가 시작된다. 갑곶 돈대에서 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 박해로 성연순과 원윤철이 통진에서, 1868년 박상손, 우윤집 등이 강화에서 순교했고, 1879년에는 통진에서 권 바오로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 하나는 1866년에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지는데, 이를 미국이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당하기도 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했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성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우물터, 및 예수님상, 야외 미사 장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교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인자한 성모님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앞서 이야기한 순교자 박상순과 우윤집, 최순복의 넋을 기리는 3위비가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곳 순교성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중에 하나가 박순집(1830~1911) 베드로의 묘이다. 인천교구는 20019월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했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당시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로 기록에 남아있다. 박순집 일가도 수난을 피해갈 수 없었으며 16명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남은 생을 하느님께 드리며 일생을 헌신하는데,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가 증언록을 남긴 것이다. 박순집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알렸다. 천주교 선교 초기 역사와 153명의 순교자 행적을 생생히 증언한 박순집 증언록은 총 3권으로, 현재 절두산순교자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이색체험도 있다. 십자가의 길에는 실제 예수님의 고난을 공감할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고 걸을 수 있게끔 십자가 모형들을 준비해 두었다. 사이즈별로 다 준비가 돼 있어 어린아이들부터 어르신들도 체험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행적 14처를 다 돌고 야외 제대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또 수백 명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넓은 야외 미사 장소(잔디밭)도 마련돼 있다.

 

복된 소식을 동방의 땅끝 조선에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강화도에 들어왔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선교사들과 신자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의 정신이 깃든 갑곶순교성지에, 이 시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