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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치골 성모 성지

윤정규 2019. 8. 3. 01:22

 

전날 밤새도록 내리든 비는 그치고 오후부터는 흐린 날씨였다점심 식사 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산376 수리치골 성모성지에 도착 시간은 오후330분경 이였다. 수리치골 성지는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성모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45817일에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그 이듬해 184610월에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하던 중에 김대건 신부가 1년도 채 안돼 1846916일 순교하고 김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활동을 중지하고 이곳 수리치골에 은거하게 된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돼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 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11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됐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해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됐다.

 

한국천주교회가 설립 200주년을 맞이하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5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가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성모성심회는 성모공경을 주로 하는 신심 단체이지만 죄인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단체의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체가 설립된 시기가 박해 시기이고, 또 선교사들이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직했다는 사실은 성모성심회가 단지 순수한 신심단체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를 집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