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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

윤정규 2019. 9. 4. 01:10


 

 천주교 성지 순례길은 멀리 스페인 산티아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169여 곳의 성지가 있다. 국내 성지 순례도 활발하다. 충남 내포 지방의 갈매못 순교성지, 공세리성당과 서울의 새남터와 절두산 성지,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 등은 국내 대표적 성지로 꼽힌다. 풍광도 아름답고 순교자의 영성도 되새길 수 있는 곳들이다. 1만명에서 많게는 2만명의 순교자를 냈다는 이 땅의 천주교 역사는 그야말로 처절한 박해의 점철이다.'박해의 역사'란 말 그대로 곳곳에는 목숨을 던져 신앙을 지켜낸 천주교 선구들의 외침을 소리 없이 전하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따뜻한 가을의 초입 햇볕 좋은날 93일 평일 낮에 나는 한가로이 걷고 쉬고 사색하며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서울시내에 있는 성지를 찾아 떠났다. 강변북로와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7번 출구로 나와 절두산 성지를 향해 걷는다.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 또는 용두로 불렀던 서강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이곳은 옛 한강 나루터였던 양화진의 이름난 경승지였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조선말,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객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을 끼고 있어 더욱 명성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까지 침입해오자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어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사건, 1871년 미국함대의 침입사건은 대원군의 서슬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병인박해는 한국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되었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봉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는 2016110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하느님의종 13위 순교자들을 축복하고 이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시복추진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된 순교자들이다. 1966년 병인양요 100주년을 기념하여 천주교 측에서는 잠두봉을 중심으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성역화 하였다. 지하 2, 지상 1층에 연면적 3,382인 기념관은 순례 성당과 순교 성인 28위 성해를 모신 지하 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 되살아나고 있다.

 

순교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절두산에 들어설 성당 설계에는 대지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이 적용됐고 설계공모 당시 성당 건축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건축가 이희태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기념관은 우뚝 솟은 절벽 위에 장엄하게 세워졌는데 원반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던 갓을, 구멍이 뚫려 있는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 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늘어뜨린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특히 순교지에 세워진 만큼 성당은 일체의 부대시설과 장식을 배제한 채 성당 본연의 기능을 위한 공간으로만 구성됐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다녀간 뒤 순례자들의 발길이 더욱 끊이지 않고 있으며, 1997117일에는 유서 깊은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 문화재법에 의거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스스로 교리를 깨치고, 수많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지켜낸 것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한국 천주교. 순교지 절두산에 세워진 성당과 박물관은 한국 천주교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순교한 교회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생생히 증명하는 우리가 소중히 보존해야 할 유산일 것이다.

                           









오후 3시 미사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