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선합정역으로 다시 돌아와 시청역에서 1호선을 갈아타고 용산역에 내렸다. 용산은 내가 약 18년을 근무하던 곳이다. 12년 전 광화문 사옥으로 이전했지만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용산우체국 옆길로 100m 올라가니 왜고개 성지가 나타났다. 가는 길에 반가운 식당들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조선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1803-1839년) 샤스탕(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 유학을 보내는 한편 장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 현 서강대 뒷산에 암매장 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 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1844-1890)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박순집 도움으로 1899년 10월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21일 용산 예수성심학교로 옮겼다가 같은해 11월2일 명동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28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이다. 또한 왜고개는 1846년 9월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노고산성지는 모방(1803-1839년) 샤스탕(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1796-1839년) 주교 세 선교사의 숭고한 순교 정신을 받들기 위해 2009년 6월 서강대 가브리엘관 앞에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봉헌했다. 노고산성지를 찾아가려면, 서강대 정문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알바트로스탑 길 건너편에 성지가 있다. 순교현양비가 봉헌된 지 올해로 10년. 성지를 관리하는 서강대 교목처는 9월 순교자성월에 순례객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성지 안내판을 새로 설치하고 순례 확인 도장함도 새로 꾸밀 계획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노고산 성지 (현 서강대)모방(1803-1839년) 샤스탕(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1796-1839년) 주교 세 분의 신부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묻혀 있다가 삼성산으로 이장되었고 지금은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이들 세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노고산 성지 성 앵베르 주교 현양비
노고산 성지 성 모방 신부 현양비
노고산성지 성 샤스탕 신부 현양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