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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성지

윤정규 2019. 9. 5. 02:41



기해박해(1839)''병인박해(1886)' 등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장소에, 성당이 세워졌다. 용산구 이촌동 1991번지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이곳이 순교 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창립(1784)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쫒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로 순교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지 6년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 지 30년 만인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돼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 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동안의 순교를 기해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 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블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 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용산에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