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이 있는 종로구 가회동과 북촌 일대는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다. 1794년 중국에서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활동했던 주 신부의 존재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 신부는 피신했고, 역관이었던 최인길은 사제 복장을 하고 주 신부 대신 체포돼 순교했다.
주 신부는 숨어 지내면서 활동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수많은 교인이 희생당하자 자수한 뒤 순교했다. 이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49년 가회동성당을 세웠다. 계동길 주택가 앞에 북촌 주민의 중요한 음수원이던 우물터가 있다. 주 신부가 계동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줬다고 한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이 물을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도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 것일까.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가 순교하자 갑자기 물에서 쓴맛이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회동 성당은 건축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지난해 서울시 건축상 일반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화려한 멋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소박하다. 도로 쪽에 한옥이 있다. 안에 들어가면 숨어있던 성전과 사제관 양옥이 나온다. 한옥과 양옥이 조화를 이루며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신부가 어깨동무하는 형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주 출입구에 있는 배롱나무 옆 김대건 신부 동상이나 마당 안에서 볼 수 있는 지붕 십자가가 없다면 성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도로가에서 보면 언뜻 사찰을 떠올릴 정도다. 원래 성당으로 사용했던 한옥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일보 사옥으로도 사용됐다. 인민군 철수한 뒤에는 초토화됐다고 한다. 전쟁 뒤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 원조로 시멘트 성당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후 2010년 18대 송차선 신부와 신자들이 성당을 재건축했다. 전국을 뒤져 국산 적송을 찾아 한옥도 지었다. 2013년 11월 한옥이 주는 고유한 정서와 현대식 건물이 조화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당 옥상은 북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이다. 남쪽으로 남산을 배경으로 한 강북 일대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북촌 한옥 지붕을 앞세운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대 초반 여성들을 위한 패션잡지 <보그걸>에서도 소개할 정도로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정갈한 분위기를 갖춘 가회동 성당은 나이와 성별, 종교를 초월한 매력을 갖고 있다.
겉모습과 달리 가회동 성당에는 여름 장마와 태풍 맞으며 붉어진 가을 대추처럼 박해와 상처가 아문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1700년대 후반 조선 지식인 일부는 중국에서 구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했다. 그 중심지가 북촌이다. 가회동 성당은 초대 교회의 사적지이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이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십자가 위치도 박해를 받던 시절 숨어서 예배하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는 성당 역사전시실에 기록돼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였던 의친왕은 “비오”, 왕비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회동 본당에 보관되어있던 옛 세례문서를 본당 사무장(김상규)이 찾아냈는데, 의친왕 이름이 “이강”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미 왕조가 끝났기에 “왕”이라는 호칭 대신에 “공”을 사용했다. 그리고 의친왕이 선종할 당시 신문기사에 그가 세례 받은 동기를 알 수 있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드님인 이강 의친왕은 1955년 8월16일 안국동 175번지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쳤다. 풍문여고 교사 뒷 모퉁이에 자라잡고 있는 고풍스런 별궁에서 파란 많은 일흔아홉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남아 있는 이 왕가(李 王家)로서는 오직 한 분인 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 할 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 비(妃) 김숙(金淑77세)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領名)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미사는 명동성당에서 거행됐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를 기억하고 죽음으로써 신앙의 진리를 지켜낸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본당을 신축하면서 1층 내부에 상설 역사전시실을 마련했다.
주 문모신부가 계동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줬다고 한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이 물을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도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 것일까.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가 순교하자 갑자기 물에서 쓴맛이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