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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愛 동행'- 천주교 서울 순례 성지

윤정규 2019. 9. 30. 12:14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인 '천주교 서울 순례길' 선포 1주년을 기념하고자 9월 한 달간 '9동행'(성지순례 24)29일 마감하면서 2019 순교자 성월을 닫는 미사를 오후3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콘솔레이션 홀에서 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주교 집전으로 거행됐다. 필자는 순례지 여권에 성지 24곳 방문확인 도장 받은 것을 제출하고 정순택 주교님으로부터 축복장을 받았다.

  

9월 한 달간 성지를 다니면서 순교자들께서 목숨까지 바치면서 신앙을 증거 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특히 최양업신부님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형벌을 이겨냈다. 하지만 그에겐 육체적 고통보다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더 마음이 아팠다. 한 살 배기 아들이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남편이 먼저 옥사하자, 이성례 마리아는 천주교를 따를 것인가, 아이들을 살릴 것인가 고민하다가 마침내 배교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고민이었으나, 결국 그 선택은 그로 하여금 성인으로 대우받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성례 마리아는 나머지 네 명의 자식과 함께 옥을 나간다. 하지만 맏아들이 신학생으로 중국에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었다. 한차례 배교했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네 아들이 감옥 창살을 붙들고 울부짖어도 다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둘째가 어머니의 굳은 마음을 확인하고 울부짖는 동생들을 달래서 발길을 돌렸다.

 

네 아이들은 옥에 찾아가면 자신들 때문에 어머니가 배교할 것을 걱정해 동냥을 해가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몇 푼의 돈을 가지고 희광이(사형 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한다.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한순간 배교한 사실 때문에 성인으로 시성되지 못했다. 모성애 마저 버리면서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목을 내놔야 되는 순간이라면 그렇게 목을 과연 내놓을 수 있을까? 목을 내놓는 것보다는 배교하는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모진 매질을 한다. 뼈가 부러지고 살 밖으로 뼈가 튀어져 나오면서도 배교해라절대배교 안합니다. ‘십자가에 침 한번 뱉어라 그럼 살려주겠다.’ ‘나 안 믿습니다.’ 이말 한마다만 하면 살 수 있을 텐데, 그 중요하고 귀한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침 뱉지 않았고, 포졸들이 하도 답답해서 한동네 사람이니까 이보게 이서방 침 뱉고 나가서 다시 천주학 믿어 나가서 자식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될 것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답답하게 꽉 막혔나?” 1초라도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새끼들이 부모 없이 거지가 되어 떠돌아 다닐 그자식이 눈에 아른거렸을 텐데도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나로 인해서 내 부모들이 온 친척들이 삼족을 멸하고 박해받을 것이 분명한데도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순교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적 훈련을 통해서...과연 그분들은 영적훈련을 구체적으로 받았을까요? 아마도 제 생각이지만 우리 순교선조들은 공수부대가 특수훈련을 받듯이 그런 강한 영적훈련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모두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했던 영적훈련은 첫 번째가 수계생활을 철저히 했을 것 같습니다. 십계명의 깊은 뜻을 알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도둑질하지마라. 간음하지마라. 이것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행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피 흘리면서 죽은 순교자들의 그 힘은 철저한 수계생활에서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기도생활에 철저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에 무슨 기도 책이 있었겠습니까? 기도서 책이 없던 그 시절 일일이 손으로 써서 외웠고 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저 귓전으로 들어서 외운 기도문이지만 아침저녁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모든 신공(神功)을 철저하게 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감옥 안에서 고문으로 만신창이 된 몸으로 끌려왔어도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배교하지 않고 순교하게 해 주십시오눈물로 바쳤을 것입니다. 장소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게 바뀌었든 기도만은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선조들은 전교생활에 철저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좋은 하느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마음 놓고 전교할 수 없었던 시절 아닙니까? 박해받던 시절에 어찌 마음대로 다니면서 나 천주교신자인데 성당에 나가자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 놓고 전교할 수 없었던 그 시절 하느님의 나라와 천국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은 옹기장수를 해가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전교를 했습니다. 목숨을 건 전교였을 것입니다. 나는 세례 받고 지금까지 몇분을 하느님 앞에 인도했나? 반성합니다. 나의무관심, 무성의 때문에 입교시킬 수 있는 사람을 못 입교시킨다면 이건 분명히 하느님 앞에 죄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세 가지의 영적훈련을 통해서 모진고문을 이겨내고 순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 마리아, 요셉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