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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

윤정규 2019. 10. 12. 16:00



바람이 불어오니 꽃말처럼 여리여리한 꽃잎이 한들한들 마음을 앗아간다. 어서 오라고, 가을을 재촉하는 길거리 모퉁이에 수줍게 피어난 코스모스 길을 따라 성지순례를 떠난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암자가 절 이름이 아닌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남한산성에서 광주시내로 가는 국도 중간쯤에 번내가 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한참 달려서야 닿을 수 있는 벽지산골에 한국 천주교의 큰 성역 하나가 있다.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이 깊고 깊은 산속에서 한국 천주교가 태동하리란 걸. 이곳은 이 땅에 천주교의 싹을 틔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서적을 통해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접하며, 이에 대해 공부하고 의견을 나눈 것이 한국 천주교의 시작점이 됐는데, 바로 그 모임의 장소가 천진암 터다. 그렇게 230여 년 전 이곳에서 낯선 서양의 종교, 천주교가 한국 땅에서 움텄다.

 

1980년대 이후 그 터를 중심으로 묘역과 박물관, 성당 등이 들어서면서 오늘날 천주교인들이 꾸준히 찾는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돌이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라고 쓰여 있는데 촛불 모양을 하고 있다. 촛불이 어두움을 밝히듯, 어둡고 캄캄했던 조선에 천주교의 빛을 비추기 시작한 장소임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 같은 촛불 기둥의 모습은 성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주차장을 지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성지 탐방길. 가장 먼저 포근하고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마주한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짚으로 지어진 움막이 보이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예수 탄생 당시의 모습을 표현한 미니어처들이 있다.

 

성당 옆에 걸린 안내판에 오전 12시부터 평일미사가 진행된다고 쓰여 있는 걸 보아 이미 미사가 끝난 듯했다. 이 성당은 광암성당으로 광암 이벽의 호에서 그 이름을 땄다. 이벽은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발견하고 젊은 선비들에게 전했으며, 조선인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 인물이다. , 한국 천주교 창립의 선조인 셈이다. 아담한 성당은 외관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성당 앞으로 길게 이어진 언덕을 올랐다. 대성당, 박물관, 묘역 등 모두 언덕을 올라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진암 성지는 건물과 건물, 그리고 묘역까지의 거리가 멀다. 그만큼 성지가 매우 넓다. 그래서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하고, 성지와 관련한 여러 생각을 하며 둘러볼 수 있다. 언덕을 오르며 잠시 낯선 학문을 접했던 이벽과 정약용 등 젊은 선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천주교의 어떤 점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르막 끝에 다다르니 십자가에 달린 황토 빛 예수상이 보인다. 마른 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서 만난 십자가상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근육질 몸매에 잘 정돈된 모습 대신 뼈만 앙상한 채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한국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이를 본 천주교인들의 마음을 더 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필자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일신형제와 정약전·약종·약용 형제, 이승훈, 10여 명의 석학들은 광암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준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일신 형제들에게 전교한다. 또 그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수도 한복판에 한국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교회의 발상지로 천진암은 교회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왔다. 지난 1960년에 와서야 이곳 지명들이 문헌에 근거해 밝혀졌고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답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서 천진암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급진전되었고 19806월에는 천진암 일대 12만평의 땅을 매입, 그 초입에 카르멜 수녀원이 문을 열었고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으로 그해 624일 제막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한 해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한국 천주교 창립선조 묘역을 이룬 것이다. 1982년 한국 천주교 창립연구원이 설립되었고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까지 토목공사를 마치고 2020년까지 기초공사를 진행 중이다. 현재는 대성당 터에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광암성당

  


                  마른 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예수상







                                                성모성당

                                                  고해소












                              계단위에  5위 성현 묘역이 있다.


                                           5위 성현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