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없더라도 무언가 절박하고 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울 때는 어디에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때 가벼운 산책과 함께 단풍을 만끽할 수 있고 옛 성(城)과 함께 병풍처럼 펼쳐지는 풍경으로 사랑받는 순교성지가 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6km 떨어져 있고 남한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 성지는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경관으로 주말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더욱이 도로 양편으로 깨끗하게 지어 놓은 기념관이나 전시장들이 들어서 있고 닭볶음탕, 산채, 메기탕, 간장게장 등 특산물 파는 식당이 충분해 찾는 이들은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천진암을 출발해 남한산성 성지로 향했다. 금요일 오후라 등산객들이 조금 보였고 자가용 승용차가 끝없이 올라오고 내려간다. 아마도 저녁시간이라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가 좋아 식사도 할 겸해서 남한산성을 찾는 것 같았다. 승용차로 또는 등산객으로 오가는 사람들 중에, 오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신앙선조들이 바로 여기서 처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늘한 산 공기를 마시며 오르는 즐거운 산행 길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과 꿋꿋한 결의가 서려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636년) 이후 지금의 성지앞 주차장에 처형 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일원, 양주, 용인, 이천에서 잡혀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치명 터가 동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동문으로 들어서면좋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서문으로 와서 로터리를 거쳐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길도 가능하다. 사실 대중교통 편은 성남방면이 더 노선이 많다. 새로 복원되어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남한산성 입구 정문을 지나 로터리에서 광주방면으로 100m 내려오면 오른쪽에 ‘천주교 순교성지’라는 푯말이 서 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39년 기해, 1866년 병인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 순교한 곳임,” 순교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푯말이 없다면 그 누가 이 풍경을 보고 이 자리에서 수백여 명의 피가 흘렀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동문을 통해 신앙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당시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터리에는 산행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가득하고 처형 터에 연이어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는 오랜만에 특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수원교구는 남한산성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자 1998년 9월30일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1978년에 마련한 부지위에 순교자현양비(2004년 9월)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 뒤편 야산에는 야외 미사 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또 순례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015년 4월25일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맞은편에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새 성당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한옥형태의 2층 건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성당 건물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기념해 토마스홀로 명칭을 변경해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순교자 복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 바오로는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이듬해 1801년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인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타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나 이때가 1802년1월30일(음력 1801년 12월27일)로,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한덕운 토마스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진술은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한덕운 토마스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끝까지 지켜냈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굴욕의 역사 현장 속에서 세상을 거스른 진정한 승리와 생명의 문을 열어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