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티순교 성지

윤정규 2019. 10. 24. 20:51

 

 신나무골 성지에서 11시 미사를 보고 한티 성지로 출발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 성지까지는 35.3km, 행정구역으로는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필자는 푸르른 하늘과 2m을 넘는 들판의 갈대들을 보며 달리는 차장가로 풀내음을 맡으면서 꼬불꼬불한 길을 돌고 돌아 화강암으로 된 한티 순교성지 안내판을 만났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가 10여대 승용차는 그 숫자를 셀 수가 없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다이렇게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집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수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의 서촌, 한밤,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850년대 큰 교우촌이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에 온 베르뇌 주교는 1862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성무집행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2년 전에 박해의 칼날이 미쳤고, 깊은 산속에서 가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더욱 모여든 이유는 그들이 한티에서 하느님을 통해 맛볼 수 있었던 평화와 위로 덕분일 것이다. 경신박해 때 김현상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한티의 중심이 되었다. 조 가롤로 그의 집안은 1839년 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기해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대구로 간 김현상 후손들은 대구 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 교회 창설에 큰 공을 세웠다.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성지조성을 위한 부지매입과 순교자묘역확인 작업을 거친 후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이 개관되었고, 2000년에는 영성관이, 2004년에는 순례자성당이 축성되었다. 피정의집 개관이래 30여 년 동안 매년 사제피정과 연수가 진행되고 있으며 해마다 전국의 순례자들은 물론 해외의 순례자들도 찾아와 영적인 힘을 얻어가고 있다또한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 가는 길이 열림으로써 도보 순례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티순교 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4기이다.

 

 

 

 

 

 

 

 

 

 

 

 

 

순교자들이 서 있는 모양

 

 

 

 

 

 

 

순교자 묘역 야외제대와 대형 십자가

 

 

 

 

 

 

 

 

 

 

 

 

 

 

 

 

 

 

 

 

 

 

 

 

 

 

 

피정의 집과 영성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