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하늘의 문 성당에서 초남이 성지까지의 거리는 32.64km 약 40분 걸린다.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367-1)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의 생가 터가 자리한 곳이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 한가운데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생가가 있었다. 생가 터에 도착하니 안 막달레나 수녀님이 빗자루로 마당을 청소하다가 반갑게 맞이한다.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수녀님께서 자리로 안내하며 초남이 성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이야기와 생가 터에 대한 이야기를 약 30여분 동안 해주셨다.
유항검은 1756년 이곳 초남이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와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1779-1801년)은 이순이 루갈다(1782-1802년)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았던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과 1802년에 신유박해로 치명할 때 까지 4년여 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인, 권상연 야고보(1751-1791년)와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이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전 등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수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웠다.
고향으로 내려와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가 독성죄에 해당됨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가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초남이에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을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 형을 언도 받고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해 10월 24일(음력 9월17일) 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1784-1801년), 동생 유관검 등 그의 일가친척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남편이 옥중 교살된 지 나흘 만에 벽동(지금의 평북 벽동군) 관비로 가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이에 루갈다는 관리에게 죽여줄 것을 요청하면서 벽동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이후 그는 곧바로 전주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이순이는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의 아들 경령군의 후손이다. 이 부부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동정부부’라는 삶을 살아냈다. 동정을 지키면서 부부처럼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순이는 자신의 수기에서 “4년간 10여 차례 욕정에 의한 고통을 이겨냈다”고 고백했다.
보두네 신부는 이들 동정부부와 천주교 가정으로 죽음을 당한 가족들을 지금의 치명산으로 옮겨 합장했다. 그리고 그곳에 큰 십자가를 세워 그 신앙심과 영혼을 기리고 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해 묘 앞에 제단을 세웠다. 이 성지는 옛 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루갈다산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용지면 남정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겼다.
성당 내부
두 분의 수녀님이 거처하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