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성 남종삼 요한·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유택지 (묘재)

윤정규 2020. 5. 1. 10:59


                                                   묘재 유택 전경

푹신푹신한 솜사탕 같다. 사뿐사뿐 걸어갈 수도 있을 것처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그리고 그 위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장엄한 대자연의 최고의 아티스처럼 황홀한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오전532분 평상시 같았으면 꿈속을 헤매고 있을 시간에 나는 울진 바닷가에서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전날 서울 집에서 마스크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내 고향 울진 바닷가 23일간 낚시를 하고 공짜로 피톤치트까지 함유한 좋은 공기를 배부르도록 마시고, 성 남종삼(요한) 유택지가 있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으로 향했다.

 

배론 성지에서 산 하나를 넘어서면 병인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1817~1866)이 살던 곳. 남종삼 요한 성인의 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려고 이사한 곳이다. 이곳은 남종삼 성인과 그의 부친 남상교(1784~1866) 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흐른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성인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로 충주목사와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남종삼이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온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교한 뒤에도 자신의 관직 때문에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다블뤼 주교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남종삼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남상교는 이곳에 살면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고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장관을 거처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올랐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한 많은 관리 중에서 돋보이는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 가난한 생활을 통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당당히 관직을 내려놓았다.

 

남상교와 남종삼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과의 교류가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홍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하게 되었다. 그때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茦)’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홍선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로 전교를 떠난 뒤라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하자 홍선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평안도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베르뇌 주교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때는 상황이 급변하자 홍선대원군은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남종삼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부친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 하고 가르켰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의금부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남종삼은 참수형이 결정되어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다블뤼 주교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고, 1968106일 시복식을 앞두고 1967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일부를 가족묘소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되었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어 부친 남상교는 공주진영으로, 장자 남명희는 전주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하고,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 또한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다. 남종삼 요한은 19845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생가 뒷편에 모셔놓은 성모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