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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골프, 그리고 한명숙

윤정규 2012. 4. 26. 12:27

 

봉하마을에 벚꽃이 활짝 피던 4월이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회갑기념으로 시가 1억원 상당의 피아제 시계 두 개를 선물했다고 진술한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비열한 짓”이라고 변호인은 반발했다. 검찰은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수선을 떨었으나 그대로 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이 명품시계를 “집사람이 집 근처 논두렁에 버렸다”고 답변한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면서 진상은 파묻혔다. 검찰 지휘부도 옷을 벗었다. 박 전 회장만 유일무이하게 활기를 되찾고 있다. 금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얼마 전 재판 중인 대법원에 사업차 베트남 출국 허가 신청을 냈다는 뉴스를 탔다.

 

명품시계 소동 1년 만에 이번엔 공짜 골프 파문이 일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때 조사를 읽은 한명숙 전 총리가 수난의 장본인이다. 한 전 총리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미화 5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뇌물사건은 증거가 부족하므로 준 사람의 진술이 결정적이다. 그러나 박 전 회장과 달리 곽 전 사장은 진술을 자주 바꿔 검찰을 곤경에 빠뜨렸다. 시중에 무죄론이 광범위하게 돈 것은 당연하다. 수세에 몰린 검찰이 회심의 반격카드로 내놓은 게 공짜 골프다. 곽 전 사장이 회원권을 소유한 제주 골프장에서 한 전 총리가 3차례 골프를 쳤고 한 번은 곽씨가 비용을 대납했으며, 하루 숙박비만 66만원인 골프빌리지를 29일간 무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곽씨로부터 단돈 1원도 안 받았다는 (한 전 총리) 주장은 거짓말로 드러났다”고 몰아세우고 있다.

 

명품시계 논두렁 유기사건으로 노 전 대통령은 일순간에 망가졌다. 공짜 골프 논란은 한 전 총리의 거짓말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계 못지않게 공짜 골프도 민심 자극적이다. 골프는 본질이 아닌 곁가지이지만 뇌물사건을 구성하는 핵심적 연결고리로 떠올랐다. 검찰의 외곽 때리기 수사 기법은 냉혹한 데다 다소 의도적인 것으로 비친다. 정의롭지 않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판단은 재판부 몫이다.

양비론적 시각이 가능하다. 검찰이 당당하지 않은 만큼 한 전 총리 처신 역시 떳떳지 않다. 골프 논란을 보면서 고위 공직자 처신의 엄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장관 신분으로 기업인과 천만원대 골프쇼핑 논란에 휩싸인 것은 문제가 있다. 총리가 현직 장관 두 명과의 총리 공관 식사자리에 그 기업인을 합석시킨 것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한 전 총리는 6·2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태세다.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노무현의 유지는 뭔가. 그는 시계 소동이 일어나기 전 인터넷에 글을 올려 ‘정치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정치인은 거짓말과 정치자금, 이전투구의 수렁에 빠지므로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는 장례식 조사에서 “말씀대로 다음 세상에서 정치하지 마시라”며 “(우리는) 임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 전 총리의 언행 불일치를 따지면 사족이 될 것이다. 지지자들이 흥분하고도 남을 일이다. 지지 여론도 상당하므로 서울시장에 당선돼 민심의 이름으로 검찰에 복수하고픈 결의가 대단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행보가 정당한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선거 후에도 재판은 계속된다. 한 번 문 것을 쉽게 놓지 않는 검찰 속성상 없던 일로 하고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장에 당선되더라도 시정에 전념하기 어렵다. 서울 시민에게 모든 피해가 돌아간다. 총리 출신으로서 양심상 피해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한 전 총리뿐이 아니다. 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 중인 이광재 의원은 의원직을 사퇴한다고 공언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도 강원지사 후보로 출마한다고 한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지만 정치인들의 약속 불감증은 중증이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태도는 실망을 넘어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