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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은 먼 옛날

윤정규 2012. 4. 26. 15:55

                                                                           체코대통령궁에서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 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

박범신의 소설 ‘비즈니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고발한다. ‘아들 과외비 마련을 위해 몸을 파는 엄마’라는 다소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서다. 비정한 자본이 지배하는 나라, 돈이 없으면 자식 공부조차 시킬 수 없는 세상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몸을 파는 행위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즈니스인 셈이다. 몸을 팔고 허리띠를 졸라매지만 꿈과 희망은 자꾸 멀어져 간다. 엄마는 외친다. “차라리 독재의 그늘에 있던 시대가 나았다.”


황당한 얘기, 소설 속의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자식 과외비를 충당하느라 골병든 중년 직장인 사이에서 전두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니 말이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을 생생하게 경험한 이들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6월 항쟁에 참여해 5공화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직장인들이 전두환 시절을 그리워한다니 가당찮은 일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면 수긍이 간다. 전두환 정권시절 중·고등학생이었던 그들은 무엇보다도 과외 전면금지 정책을 떠올린다. 신군부는 1980년 이른바 ‘7·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다. 골자는 대학생의 과외교습과 재학생 입시목적의 과외금지였다. 서민가계를 옭아매던 사교육을 단칼에 잘라버린 것이다. 비싼 과외비로 고통 받던 서민들이 환호한 것은 당연했다. 신군부의 서슬 퍼런 단속이 이뤄지면서 과외열풍은 삽시간에 사라졌으니 말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게 됐다. ‘개천표 용’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당시 과외금지 혜택을 톡톡히 누렸던 중·고등학생들은 이젠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 됐다. 하지만 부모세대와는 달리 자식 과외비를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위안을 삼지만 고통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모습도 안쓰럽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밤늦도록 과외에 시달리는 것을 바라보면 답답할 뿐이다. ‘5공 시절이 그립다’는 푸념이 절로 나올 만하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대 서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녀교육이다. 자식이 어떤 대학을 가느냐에 따라 출세 여부가 결판나는 세상인 탓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은 먼 옛날 얘기일 뿐이다. 유아 때부터 영어, 피아노 과외를 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미친 짓 같지만 대부분 월수입의 절반을 사교육에 쏟아 붓고 있다. 과외비 마련을 위해 아예 엄마까지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50대 여성 고용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자료가 반증한다. 노래방, 단란주점, 간병, 식당 등등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소설 ‘비즈니스’ 속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사교육은 서민가계를 옥죄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저출산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소비 위축은 물론 노후준비 부족으로 이어지면서 경제·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사교육공화국 망국론이 결코 헛말이 아니다.

 

사교육비를 반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한 정부는 변죽만 울리면서 되레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정치권도 기대난망이다. 허구한날 무상복지니 반값등록금이니 하며 공방만 벌이고 있다. 내년 총선·대선에서 표만 얻겠다는 포퓰리즘에 다름아니다. 물론 복지나 등록금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민들을 더 절망케 하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사교육비다. 그런데도 정부나 정치권이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 ‘전두환 시절이 그립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란다. 표 장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정치권에 서민들은 이렇게 일갈하고 싶을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사교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