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본 한반도
외딴 농장에 떼강도가 들었다. 강도들은 가족을 인질로 잡아 꽤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즐긴다. 36개월 만에 큰아들이 탈출해 경찰에 신고한 뒤에야 강도들은 잡혀가고 자유를 얻는다. 3년 동안 농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버지는 큰아들을 탈출시킨 게 들통 나 강도들한테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는 강도들의 밥과 빨래를 해줬다. 큰딸은 반항하다 자살했고, 둘째딸은 강도와 사랑에 빠졌다. 막내아들은 강도들의 배려로 공부를 했다.
농장을 되찾은 큰아들이 뒷수습을 하려니 엄두가 안 났다. 아버지와 누나는 죽었다. 어쩔 수 없이 강도 시중을 들어야했던 어머니는 몸져눕고, 여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남동생은 검정고시를 통해 판사가 된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작은삼촌이 달려와 한바탕 난리를 친다. 형수에겐 왜 형님을 죽인 강도들한테 밥과 빨래를 해줬느냐고 하고, 큰조카한텐 36개월 동안 강도들에게 부역한 걸 나무랐다. 여조카에겐 미쳐도 싸다고 손가락질하고, 막내조카한텐 어떻게 강도들 도움으로 공부했느냐고 야단을 친다.
36년간 나라를 잃었던 일제강점기를 재구성한 이야기다. 누가 이 농장의 구성원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작은삼촌의 비난은 온당할까.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김구의 말은 무조건 맞을까.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대한민국 개국공신 상당수를 친일파로 몰아붙인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도, 애국가를 지은 윤치호도, 6·25전쟁의 두 영웅 백선엽과 김백일 장군도, 나라를 부강하게 한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파로 단정한다. 일제 때 일본군이나 공무원으로 복무한 전력과 부역 혹은 굴복이 이유다. 자그마치 36년, 아니 40년이다. 한 세대를 넘는 그 긴 세월 동안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망국 초기 1년 동안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국민은 총인구의 1.1%에 불과하다. 98.9%는 독립운동을 못했거나 안 했다는 통계다.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착취를 당한 식민지 여인들처럼 모두가 피해자이자 부역자인 셈이다.
종북좌파들은 북한의 김일성을 독립투사로만 믿고 있다. 하지만 ‘친일파 사냥꾼’ 민족문제연구소의 잣대로 보면 김일성도 친일파다. 훗날 부주석까지 역임한 김일성 친동생 김영주는 1932년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에 투항한다. “꼭 대를 이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김일성이 권했다. 김영주는 일제의 관동군 통역(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다 8·15 광복을 맞는다.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과 군부 등 주요 핵심간부 중 16명도 친일파다.
북한 정부 초대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김일성의 외종조부 강양욱은 일제 때 도의원을 지냈다. 내각 부수상 홍명희는 이광수 등과 함께 전쟁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이고, 보위성 부상 김정제는 양주군수를 지냈다. 문화선전성의 조일병 부상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지원유세를 주도했다. 공군사령관 이활,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모두 나고야항공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다.
반면, 대한민국 초대 정부는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이범석 국방장관 등 전원 임시정부나 광복군 출신 인사들로 구성됐다. 단, 한 명의 친일파 출신도 없다. 그럼에도 종북좌파들은 훗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와 친일인사를 등용했다고 이승만을 매도한다.
‘늦게 태어난 행운’으로 그때 그 시절을 피한 우리는 무심코 작은삼촌이 됐다. 강도들에 굴복하고 부역했다고 형수와 조카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잘못은 강도들이 저질렀는데도 말이다. 피해자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사이 가해국 일본은 희희덕거리며 또 다른 강도짓을 획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