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폼보다 품

윤정규 2021. 8. 21. 12:23

지하철 안이 갑자기 소란스럽다. 노인과 장년의 남자가 다투기 시작한다. 언성이 높아지더니 욕설이 오간다. 급기야 장년의 남자가 비상벨을 눌러 보안요원을 호출했다. 다음 역에서 전동차가 한참 동안 멈추었고, 두 사람은 보안요원과 함께 하차했다. 전동차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싸움의 발단은 별 게 아니었다. 장년의 남자가 노인에게 조용히 전화통화를 하라고 요청하자 노인이 버럭 화를 낸 것이었다. "당신 몇 살이야?" "내 둘째 사위뻘이구먼. 넌 부모도 없냐?" 노인은 씩씩거리며 나이로 승기를 잡으려 했으나 잘 먹혀들지 않았다.

이런 소동을 지켜보면서 입을 간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일찍이 공자는 나이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고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이순(耳順)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구순(口順)이 아닐까 싶다. 입이 순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얘기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대체로 말이 늘고 잔소리가 많아진다. 오죽 했으면 지갑은 열고 입을 닫으라는 말이 생겼을까. 사람의 나이는 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전 횟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나이테가 아니라 삶의 연륜이다. 연륜을 지닌 어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말이 촉새처럼 빨라서는 안 되며, 천천히 품위 있게 말을 풀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구순의 자세이다.

나이를 계급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면인 상대에게 집요하게 나이를 캐묻는 부류들이다. 나이를 통해 ‘내가 너보다 위’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속셈이다. 그것은 일종의 갑질이다. 어쩌면 그가 잡을 수 있는 폼이 나이뿐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폼나게 살고 싶어하지만 폼보다 중요한 게 '품'이다. 폼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멋이라면 품은 내면의 인품에서 배어나는 멋이다. 폼은 남에게 보이고 싶은 과시욕에서 나온다. 겉이 화려한 만큼 속은 텅 비어 있기 쉽다. 반면 품은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므로 남의 이목과는 상관이 없다. 타인의 시선이 필요한 폼과는 달리 품은 홀로 있어도 별처럼 고고한 빛을 낸다.

품을 가늠하는 첫 번째 요소는 입이다. 한자어 품(品)이 입(口) 세 개로 구성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의 품격은 넉넉하고 부드러운 말에서 드러난다. 말이 그의 등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다. 입에 들어간 음식은 소화기관을 거쳐 변으로 나온다. 다들 변이 더럽다고 멀리하지만 변은 거름으로 변해 만물의 생육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거짓과 험담, 막말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화의 불씨가 된다. 예수가 역설한 것은 후자의 위험성이다.

험한 말로 타인을 제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대를 때려눕혔다고 쾌재를 부르지만 그의 품위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태이다. 그는 과연 승자일까, 패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