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이 넘은 어떤 부부의 얘기이다. 남편은 불치병에 걸려 집안에서 주로 생활했다. 하루는 아내가 남편의 어깨를 주무르다 예전에 남편이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고집 센 남편은 입을 꾹 닫았으나 눈빛에는 불쾌한 기분이 역력했다. 해묵은 감정을 용서로 풀지 못한 부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영어에서 용서 forgive는 for(completely·완전히)와 give(주다)의 합성어이다. ‘완전히 준다’는 뜻의 이 말은 ‘자신을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증오의 감옥에서 자신을 풀어주는 것이 용서라는 얘기이다.
용서를 통해 증오에서 출옥한 인물로는 남아프리카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꼽을 수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만델라에게 물했다. “당신을 감옥에 가뒀던 교도관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하셨더군요. 그들에게 증오심이 끓어오르지 않았습니까?” “물론 증오했지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교도관들은 나를 27년이나 가두었는데 그들을 증오한다면 나는 계속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나는 자유롭고 싶었고, 그래서 용서했어요.” 만델라의 대답이었다.
히브리 성경에서 용서하다는 뜻의 동사 '슈브(shuv)'는 '돌리다' , '되돌리다'를 의미한다. 악을 선으로 되돌리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서로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그것을 치유하고 금이 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용서이고 관용이다. 용서하면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새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용서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pardon의 don은 라틴어 donum(선물)에서 나왔다. 타인에게 베푸는 선물이 용서라는 것이다. 그 선물은 상대를 향하지만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용서는 분노를 줄여준다. 위스콘신매디슨대학의 연구자들이 분노의 수위가 높은 청소년들에게 12주간 용서하는 법을 가르쳤더니 분노의 감정이 낮아졌다고 한다. 용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춰주고 우울증을 개선하는 치료 효과가 있다.
용서는 하는 쪽이 받는 쪽보다 행복하다. 아무 조건 없는 용서가 사과 등의 조건을 붙은 용서보다 더 많은 행복감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마음속에 원한을 가지면 가장 괴로운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상대를 증오하면 나의 내면이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지옥으로 변해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서간 강해’에 이렇게 썼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입은 다물어도 사랑으로 다물고, 말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말하라. 나무라도 사랑으로 나무라고, 용서해도 사랑으로 용서하라.”
우리는 매일 수많은 감옥을 만든다. 증오, 미움, 탐욕, 분노, 걱정, 절망 등 형체 없는 감옥을 만들고는 스스로 자신을 가둔다. 그러면서 “왜 나만 불행하냐”며 세상을 원망한다. 주변의 사람이나 상황이 나를 궁지로 내몰 수 있으나 결국 나를 감옥에 가두는 이는 나 자신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죄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과연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인가, 바깥에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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