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양명학자 왕양명은 젊은 시절에 주자학의 원리를 깨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대나무 숲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모든 만물이 각기 하늘로부터 받은 이치를 품고 있기에 한 사물의 이치를 꿰뚫으면 만물의 이치에 통달할 수 있다는 주희의 이론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두 젊은이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대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음으로 대나무를 느껴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나무의 겉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더욱 굳은 결의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사흘째가 되자 왕양명의 친구가 탈진해 쓰러졌다. 왕양명은 혼자 도전을 계속했다. 중도에 멈춘다면 만물의 이치를 깨달을 기회를 놓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왕양명도 일주일쯤 지나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기력을 되찾은 왕양명은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대나무의 이치가 대나무 속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왕양명은 “사물의 모든 이치는 마음 안에 있다”고 역설한다. 우주의 모든 일은 자기 안의 일이고, 마음을 떠나서는 사물의 이치는 없고, 물상(物象)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왕양명이 이런 주장을 펴자 그의 지인이 “이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피었다가 지는데 당신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졌다. 왕양명이 대답했다. “당신이 이 꽃을 보기 전에 꽃은 당신처럼 외롭게 존재하지만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꽃의 빛깔이 선명해지니 이 꽃이 당신의 마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선승 잇큐 선사는 떠돌이 승려가 "내 가슴속에 부처가 있는지 보자"며 칼을 들이대자 이렇게 응수했다.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꽃이 피는가!"
잇규 선사와 왕양명의 생각은 불교 화엄경의 '심외무법(心外無法)' 이치와 같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므로 마음밖에 다른 법은 없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도 “사람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봄이면 산에 들에 피는 꽃들이 그리도 고운 줄 나이가 들기 전엔 정말로 정말로 몰랐네. 내 인생의 꽃 다 피고 또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내 마음에 꽃 하나 들어와 피어 있었네.” 가수 양희은이 부른 ‘인생의 선물’이라는 노래이다. 젊은 시절에 수없이 꽃을 보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다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 탄식이다. 그것은 아마 젊은 시절에 마음으로 꽃을 보는 법을 몰랐던 까닭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먼저 마음속에 꽃이 있어야 한다. 내가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꽃에 무관심하다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이다. 세상이 온통 물들어도 내 마음속에 단풍잎 한 장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느끼겠는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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