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7/4 백두산 천지 및 광개토대왕비, 압록강 등 고구려 유적지 찾아
-잃어버렸던 역사와 잊고 지낸 형제에 대한 안타까움 새록새록 되살아나
평화통일 기원을 위해 백두산 서파, 남파를 다녀오다
글 사진 윤정규 (세계타임즈 고문, 칼럼니스트) | 입력 2018-07-09 10:52:14
▲백두산 천지1440계단에서 천지를 구경하기 위해 올라가는 중국인 한국관광객을 향해 자신의 힛트곡을 열창하고 있다.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5박6일(6.29~7.4) 일정으로 중국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백두산 고구려유적지 압록강 답사는 진정한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모인 지인과 친구들이다. 특히 70년~80년대에 이름을 날렸던 건아들의 리더 박대봉 가수도 동행했다.
여행 중 백두산, 광개토대왕비, 압록강, 북한주민, 조선족 등을 보거나 만나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적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뿐 아니라 일행 대부분이 여행 중에 잃어버린 역사와 잊고 살았던 한쪽 형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혀를 차거나 장탄식을 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도 2년 전처럼 배편이었다. 인천 제1국제여객선 터미널에서 ‘동방명주(東方明珠)호‘를 타고 비행기로 2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16시간을 항해했다. 하지만 지루하거나 심심하지는 않았다. 바다는 항상 색다른 세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건아들의 리더 박대봉이 자신의 힛트곡 '젊은 미소'를 열창하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항해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고기 잡는 어선들, 누군가 던져주는 ‘새우깡’ 맛에 취해 선상을 맴도는 갈매기 무리 등을 보고 있으면 여행은 역시 ’이런 맛’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북한과 마주한 중국의 국경도시 단동에 도착한 것은 여행 둘째 날 오전 9시였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 후 4시간을 달려 송강하에 도착했다.
2년전 까지만 해도 중국의 열악한 도로 사정은 버스의 운행을 더디게 했지만 지금은 고속도로가 송강하 까지 개통되어 힘들지 않게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옛 고구려의 영토를 관망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산천이 우리의 땅처럼 느껴져 왠지 낯설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애국가 가사에도 나오는 백두산은 반만년의 우리 역사를 묵묵히 지켜 온데다 해발 2744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많은 시인과 묵객도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경치도 뛰어나 누구나 생전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로망의 산’이다.
백두산 천지로 오르는 길은 서파, 북파 2가지 루트 가운데 비교적 쉬운 길이면서 천지가 용암을 분출하면서 만들어낸 V자형태의 금강대협곡, 천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파를 이용해 우리 일행은 등정 길에 올랐다. 20번 이상 백두산을 찾아 천지를 구경했지만 백두산은 나를 잘 반겨주지 않았다.
단 한차례 올라도 천지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번을 찾아도 끝내 천지를 못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천지 구경도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는 ‘복불복(福不福)’인 모양이다. 출발 때부터 맑은 날씨를 보여 우리 모두는 기분 좋게 1440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건아들의 리더 박대봉 가수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이번 백두산 여행에 동참했는지 물어보았다.
▲가수 박대봉이 단교에서 기타연주와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고 있다.
"전쟁의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선물은 평화일 것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평화는 거짓 개연성이 짙습니다. 미국의 압박에도 핵 폐기 일정을 안 내놓고 버티면서 세 번이나 중국으로 달려간 연유를 생각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모부와 형님 그리고 인민들을 서슴없이 죽이는 그런 독재자가 자기 인민에게도 주지 않는 평화를 남쪽에 보장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안보관은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미 군사훈련이 중단되고 주한미군의 위상까지 흔들리고 있고. 국민들은 북핵엔 눈을 감고 금강산 관광을 떠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북한이 보장하는 평화는 불안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 그렇게 퍼주었건만 연평해전(서해교전)을 일으켜 북한으로부터 공격 받은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되고, 우리 군인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천안함, 금강산에서 박왕자 피살 등 아무리 문서로 서명하고 약속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언제든 깨어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수천 건의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대개 2년도 못가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평화는 그것을 지킬 힘을 지녔을 때에만 보장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박대봉 가수는 왼쪽 손엔 기타를 들고 있고 오른쪽 손을 보니 주먹을 움켜진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계속해서 가수 박대봉씨는 "중국의 송을 침공한 금 태종은 송나라 결사대의 저항에 막히자 평화를 제의했습니다. 송나라는 금 황제에게 황금 500 만량 등을 바치고 평화조약을 맺었고. 금의 군대가 물러간 뒤 송나라에는 평화론자들이 득세했습니다. 2년 후 금은 무장 해제된 송을 다시 침략해 황제를 죽이고 백성들을 잡아갔습니다.
일본 오사카성의 성주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꾐에 속아 멸족을 당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세 겹의 수로로 둘러싸인 오사카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꺼낸 카드 역시 평화였습니다. 이제는 평화롭게 삽시다. 평화의 상징으로 성의 수로부터 메웁시다. 히데요리가 밤을 새워 수로를 메우자마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쳐들어와 성을 점령했고. 성주의 일족을 참살하고 적장의 말을 믿는 바보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위기의 경고음을 내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자칫 전쟁주의자나 극우주의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입니다. 누군가 거짓 평화의 위험을 알리면 '그럼, 전쟁을 하자는 거냐'고 팔을 걷어붙입니다.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 보세요. 댓글들이 박정희는 개xx고 김일성은 영웅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6.25전쟁을 일으켜 약139만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장본인 김일성이 영웅으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동참해 백두산 천지에서 김정은에게 우리 한민족과 우리 후세들을 위해 진정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참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대봉 가수의 말을 듣고 필자는 평화를 지키려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경구처럼 대화의 시기에도 안보엔 빛 샐 틈이 없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대봉 가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듯 1440개단을 올라와 천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진한파란 색깔의 천지가 우리 일행을 보고 미소 띠우고 있는 것 같았다.
박대봉 가수는 천지 앞에 서서 "진정한 평화통일을 합시다."라고 외치고는 자신의 힛트곡 '젊은 미소'를 기타연주와 함께 불렀고 이것을 본 중국관광객과 한국관광객들의 환호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천지를 보고 하산하면서도 다양한 자생식물이 피어있는 고산화원의 정경에 넋을 잃은 채 “백두산이 괜히 백두산이 아니다”라는 말을 일행들과 주고받았다.
우리일행은 금강대협곡을 구경하고 그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6월1일부터 개통된 남파로 향했다. 2시간을 달려 남파 입구에 도착, 자동차를 바꿔타고 남파정상에 올라가니 오전 서파에는 깨끗한 천지가 10m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운무와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10분 정도 비바람을 맞으며 사진촬영을 하는데 순식간에 운무가 날아가고 진한 파란색의 천지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정말 우리 일행들은 복이 많은 사람들인가 보다. 서파, 북파는 천지가 안보이는 곳이 많지만 남파에서 본 천지는 한 눈에 모두 들어왔다.
▲ 가수 박대봉이 북한식당에서 자신의 힛트곡과 기타연주를 하고 있다.
여행 나흘째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을 찾았다. 이곳에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장수왕릉, 국내성 성벽 등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동북아의 작은 반도에서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있는 우리에게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대륙성을 상징한다.
광개토대왕의 사후 후세들이 바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는 평생을 말 위에서 보냈던 그의 위대한 역정을 보여주고 있다.
17세에 왕위에 올라 39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2년의 재위 기간 대부분을 그는 거칠고 고단한 도전의 시간으로 채웠다. 짧은 생애를 편안한 왕궁이 아니라 거친 황야를 달렸기 때문에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의 터와 능은 자국의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의 야욕 속에 이제는 중국인들의 주요한 역사탐방 루트가 돼 있었다. 그를 보기 위한 중국인 관광객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관 속의 웅대한 광개토대왕비를 올려다보자 어느덧 내몽고의 광할한 초원에서 기마병 무리의 선두에서 말을 모는 대왕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광개토대왕의 웅대한 기상을 우리 지도자와 국민이 오늘날 되살릴 수만 있다면 무언가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행 중 느낀 서글픈 상념은 이뿐이 아니었다. 단동 도착 첫날은 일정에 쫓겨 압록강을 ‘주마간산’으로 봤으나 여행 마지막 날에는 온전히 볼 수 있었다. 보트를 타고 강 건너 북쪽 어린이, 빨래하는 여인, 강의 모래를 채취하는 노동자, 자전거를 타고 구경 나온 청년, 군인 등 2002년 필자가 평양을 방문해 평북 정주에서 본 초라한 북한인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압록강을 사이에 놓고 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국 쪽에 비해 북한 쪽은 변변한 건물 하나 없는데다 우리의 60∼70년대 풍경을 연상케 하는 북쪽 사람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이다.
내가 본 2018년 7월 압록강은 장도상의 소설 ‘찔레꽃‘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은 탈북 여성 ‘충심‘의 기구한 삶을 그리고 있다. 순진한 17살 처녀 충심은 인신매매 범에게 속아 북한을 탈출하지만 헤이룽장성의 궁벽한 농촌에 팔려 시집갔고, 이후 남편의 의심과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한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메이나, 소소, 은미로 이름을 바꾸며 월경하지만 현실은 끝까지 혹독했다. 몽골 초원까지 거처 한국에서 정착했으나 선교사 일당에게 정착금과 생계비를 갈취당한 충심은 노래방 도우미, 매춘으로 전락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다시 이 책을 펴든 나는 ‘또 다른 ’ 충심이 우리 일행이 지나온 지안, 단동 등지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유를 찾아 헤맬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또다시 서글퍼졌다.
▲여행을 함께 떠난 지인들이 백두산 남파의 천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원한 기억과 추억 속의 한 페이지가 되길 고대하면서 말이다.
일상을 잠시 접어 두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낯선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여행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 고단하고 피로한 과정 역시 피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다시 떠나기를 갈망하는 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이번 여행에 많은 협조를 해주신 건아들의 리더 박대봉, 김재용박사, 김원연 사장, 신동화 회장, 홍용표 사장, 홍재욱 회장, 문광주 사장 등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저작권자ⓒ 세계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의 첫 성당 합덕성당 (0) | 2019.05.06 |
---|---|
베트남 여행기 (0) | 2019.05.04 |
청정자연의 낙원 라오스를 다녀오다 (0) | 2016.12.13 |
바르셀로나의 성가정성당 (0) | 2012.04.26 |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와 사라고사를 가다 (0) | 2012.04.26 |